고단한 입시생들의 허기를 채워준
칼국수는 재료에 따라서 종류가 참 많은 음식이다.
바지락 칼국수, 닭칼국수, 육개장 칼국수, 멸치 칼국수, 사골칼국수 등등.....
묵직하게 우려낸 국물에도, 맑고 시원하게 우려낸 국물에도, 칼칼한 양념의 국물에도 어디에나 성격 좋고 배려심 깊은 친구처럼 칼국수면은 국물 속에 들어가면 조화를 이뤄낸다.
칼국수 중에서도 나는 맑고 시원한 국물의 멸치칼국수를 가장 좋아한다.
특별한 기교를 더하지 않아도 멸치, 다시마, 채소로만 우려낸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
여기다 칼칼한 양념장과 김가루만 있으면 최고의 조합이 된다.
밀대로 반죽을 밀어내고 툭툭 썰어낸 면발은 굵기가 서로 달라 양념이 밴 정도도 다르다.
맛과 식감을 느끼며 씹다 보면 입안이 꽉 찬다.
멸치칼국수를 특별히 편애하게 된 것은 내 안의 기억 때문이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학교가 끝나면 매일 미술학원으로 향해 밤늦게까지 그림에 매달리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입시미술학원들이 밀집해 있던 거리의 가까운 곳에 재래시장이 있었다.
동래 시장. 재래시장이지만 꽤 규모도 있고 다양한 상점들이 많았는데 건물 안쪽에는 싸고 양 많고 정감 넘치는 식당들이 있었다.
그중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었는데 칼국수집이었다.
2000원이면 양도 많고 맛있는 칼국수를 먹을 수 있어서 주머니가 다소 가벼워도 부담 없이 들러서 든든히 한 끼를 챙길 수 있는 곳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저녁 시간, 다들 저녁도 거른 채 열심히 그림에 매달리고 있었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쓱쓱, 사각사각 하얀 도화지 위를 움직이는 연필 소리만 들리는데 하나 같이 그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지쳐 가고 있었다.
소묘실 문을 열고 들어오신 원장 선생님이 멈춰 서서 우리를 보시더니 다들 연필 놓고 일어나라고 하셨다.
'왜지? 평가하시려고 하시려나? 완성도 안 됐는데....'다들 주춤주춤 일어나는데 외투를 걸치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림 그리다가 갑자기. 의문 속에서 원장님을 따라간 곳은 동래시장 칼국수 집이었다. 다들 칼국수 한 그릇 먹고 힘내라고 하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 한 그릇이 앞에 놓이고 얼마 남지 않은 입시에 지쳐 가던 우리는 저마다의 고충들을 즐겁게 이야기하며 칼국수들을 먹었다.
뜨끈한 칼국수를 후룩후룩 먹으며 이야기하는 어려움들은 칼국수 면발과 함께 잘근잘근 씹혀 삼켜지고 날아가 버려 다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분 그대로 학원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풀리지 않던 그림들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날의 칼국수 번개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기억 한편에 따뜻한 위로로 남아 있다.
고3, 입시, 겨울, 추위 이 모든 것들이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의 온기로 데워지고 녹아내렸다.
칼국수의 맛도 맛이거니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후배이자 제자인 우리들의 마음을 알고 따뜻하게 감싸 주신 원장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 아닐까....
그 이후로 나에게 최고의 칼국수는 멸치칼국수이고 최고의 칼국수 맛집은 동래시장 칼국수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