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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May 08. 2024

거울은 곧 나를

김경인, 한밤의 퀼트

모든 빛을 먹어치운 검정
오를수록 아래로 잡아당기는 계단과
검게 칠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던
누덕누덕 기운 맨 얼굴

나의 바닥을 비추는
생생한 거울에게서
빌린 것


1) 여긴 수요일 무채색의 고장


형식상의 특징에 주목한다면 가능한 직접 시집들 구매하여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감히 이미지로 싣을 수 없는 작품에 경외감 같은 거랄까. 이는 텍스트 자체의 구조가 위화감 또는 기시감을 줌으로써 예술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속발음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 잘 느낄 수 있을까, 또는 문장 구조의 특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 대개 시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은 텍스트 안에 많은 것이 숨어 있고 그것을 읽어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시라는 문학의 매력이며 예술로서의 정점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텍스트 그 자체에서 느끼는 흥미와 더불어 내용적인 의미에 몰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시인의 말을 통해 맨얼굴이 들통나기 싫어했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거울이란 나를 가장 잘 비춰 보는 것일 터인데, 오히려 시에서는 거울 속의 나를 나만 본다는 사실이 답답하고 갇혀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무너진 지붕 위로
봄눈을 내려준,
거울 속으로 들어가면
거울안에 나를 가두는,
부수면
더 큰 거울을 보여주는,
내가 뜯어먹고 자란,
부르면
수백개의 다른 음성으로
우르르 쏟아지는,
자라나는
내 거울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한번도
서로의 밖을 바라보지 못한,
손 내밀면 빼앗아 사라지는,
거울 속에 숨어
거울 만드는
사람

/거울 만드는 사람


이런 괴담이 있다. 양쪽에 거울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 몇 번째 거울에 비춘 나는 내가 아니라는 말,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죽는다는 이야기. 거울에 있는 나는 분명한 나일 것인데, 이런 이야기도 덧붙여 볼까. 거울에 있는 나에게 라고 묻고 또 묻는다면 정신병에 걸린다는 낭설들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저 떠도는 이야기일 뿐일까?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웃지만 내심 무서워서 결코 스스로 그 일을 직접 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힘은 이런 것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이것도 나만의 유머 코드였다는 농담은 어떨까.


일요일엔
금방 유쾌해질 거야
서로의 절룩이는 자세를 흉내내기 싫어
안달이 났지만
뼛속까지 너는 검고 나는 바닥이 없지

창백하지,
네 얼굴과 모처럼 딴판인 내 얼굴이
웃으면서 안녕, 돌아서는
일요일은 밀랍처럼

/ 일요일에 만난 사람


<일요일에서, / 오지 않는 일요일에서>와 같은 문장을 바탕으로 하여 ~에서 라는 부사격조사를 활용할 때 일요일이 오지 않는다는 것인지 또는 일요일이 오지 않는 일요일에 이미 있다는 것인지에 대해 주목해 보았다. 보편적으로 일요일은 쉬는 날, 종교인이라면 교회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일요일에는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지만 알고 보니 지금이 일요일이었다는 파괴적인 절망에서 은은한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시인의 발상이 신선하다.


난 밤에만 눈을 뜨지, 아주 오래 감은 눈 속에서 나는 당신을 보네.
감은 눈동자 속에 몰래 스며든 당신을 아무도 찾아낼 수는 없지. 나는 밤에만 눈을 뜨고 자정이며 당신을 노크하지. 당신이 나를 잡아당기면 눈동자는 파르르 떨리네. 나는 당신의 정면이 그리워서 눈꺼풀을 자주 깜박거리네

/ 우는 사람
당신은 불 꺼진 밤거리처럼 꼭 닫혀 있습니다. 당신의 입술은 폭발 직전 대합실의 창문 같군요.
누군가는 달아나고, 누군가는 죽고, 지워지고, 절대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것들이 당신을 포위할 때.
당신의 혀는 유연하고 매끈하지만 당신을 단단히 묶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말 속에 잠겨 당신이 허우적거리고, 나를 바라보는 두 눈만 남기고 휩쓸려 눈물 속으로 다라지는 동안,
나는 도금한 어금니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당신의 입구에 앉아 있습니다.
나는 영원히 듣는 사람입니다.

/ 듣는 사람


생각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게 된다는 사람을 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혼잣말은 분명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 그 힘과 능력을 믿고 또 그런 행위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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