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지 May 01. 2024

얼음과 눈의 결정체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시인의 말

나는 잠깐씩 죽는다

눈뜨지 못하리라는 것
눈뜨지 않으리라는 것
어떤 선의도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
불확실만이 나를 지배하리라

죽음 안에도 꽃이 피고 당신은 피해 갔다

2020 년 12월
이규리


제목을 차치하고 읽은 시에 대한 감상만 적는다면 나는 아마 이 책을 조용하고 맑고 투명하고 동시에 고요하다는 단어들을 나열해 보고 싶어 진다고 말할 것이다. 아래에 적은 시처럼 우리가 숨겨 놓은 비밀들에 대해서 속삭이듯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나는 그것에 선택권이 없어요, 하지만 그것은 나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와 같은 모순점을 만들어 낸다. 나는 이 시의 아름다움이 그런 지점이라 생각한다.


상자들을 두고 그들은 떠났다

아래층에 맡겨둔 봄을
아래층에 맡겨둔 약속을
아래층에 맡겨둔 질문을
아래층에 맡겨둔 당신을

아래층이 모두 가지세요

그 상자를 나는 열지 않아요

먼저 온 꽃의 슬픔과 허기를 재울 때
고요히 찬 인연이 저물 때

생각해 보면 가능이란 먼 것만은 아니었어요

/ 상자


무의미한 일을 해 보기로 하자. 해 지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시간을 죽이며 그 시간을 응시해 보는 것이다. 누가 봐도 아무런 표현도 보여 주는 것도 없는 시간의 흘러감을 텍스트로 표현하고 동시에 이를 읽고 감상하면서 우리는 오롯이 시에 나타난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 시를 통해 그 장면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내 마음의 슬픔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산책은 나무에서 나와 나무 아닌 곳으로 들어간다

해 질 무렵이면
마음은 곧잘 다른 마음이 되어

노을을 낭비하였는데

이어지는 저녁의 이야기는
흐린 은유는

아무 때나 친절하면 안 된다는 듯

우리는 지나가는 그늘
공기조차 알아채지 않도록

그건 나무에게 이름을 걸어주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

없는 슬픔이 도와
그러므로 그래서

안녕히 가세요
나의 시간

/ 그러므로 그래서


물의 축축한 감각을 떠올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촉감은 아니다. 깊고 어둡고 차가운 느낌 대개 물이라고 하면 바다나 강을 떠올리게 된다. 그 아래를 직접 들어가 보지 않으면 모를 깊이와 미지의 세계가 나를 두렵게 한다. 발이 닿기 위해서 안간힘을 쓸 때 오히려 물에 빠져 익사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감정을 조금씩 음미해 본다. 눈과 얼음이 녹으면 결국 물이 된다는 감상으로 귀결된 채 촉각적인 감각에 집중해 본다.


물론 이 시의 대표적인 제제라 함은 첫눈과 얼음이다. 그것들은 물이 되기 전 또는 물이 되기 위한 과정을 겪는 존재들이다. 그 과정에서 그것들은 녹기 마련인데, 나는 시인이 그것을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라 이해했다. 눈과 얼음은 물질적 상태에서 고체이지만 그것이 녹아 액체가 되고 증발되어 날아가 기체가 된다면 그대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 죽음이 공포 슬픔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으로 읽어내 보기로 한다. 녹고 사라지는 것은 첫눈과 얼음이라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운명적인 것이기에, 그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일전에 또는 요즈음 꽂혀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세상에 의외로 의미를 담은 것들은 없고 또는 구태여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고 직면하는 것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반응이다. 나의 사유와 시집의 텍스트가 맞물려 매우 좋은 시를 읽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축제는 축제를 견디려 종일 서 있었다

잠시 그들의 일부가 되어주기로 하였으므로

음악이 흐르고
불빛이 내리고

나는 잘 죽어야 한다

하루를 사는 일
이건 녹지 않으려 안간힘 쓰던 저들 삶과 얼마나 다를까

잠시를 영원으로 아는 사람 눈먼 사람 말이네

모든 날들인 하루
그래 하루라는 건 결코 허한 시간이 아닌 거야

부재하고 싶었어 멸하고 싶었어 저 실상으로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목이 가늘어지지만
나는 서서히 사라져야 한다

어떻게 죽는 방식이 사는 이유가 되었니

카펫을 적시며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적막을

투명하다는 건 힘이 될 수 없지만
어떤 패도 지킬 수 없지만

버티어온 힘으로
그러니 다시 고쳐서 말해보자

죽음이 이미 거기

있었으므로,

/ 얼음 조각
혼자 울고 싶은 날이 있지
해 질 무렵
어떤 매혹이 강을 부르고

위험을 친근하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강물 쪽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었는데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산책로 한쪽에 주차한 승합차 운전적에서
한 여자가 울고 있었다
오로지 울고 있었다

내 울음이 그쪽으로 건너간 듯

방죽을 돌아 다가갔을 때
그녀 아직 울음 속에 들어 있었다

울음에도 유속이 있어
어떤 소용돌이에선 전신이 다 빨려나가기도 하지
한순간이 자포자기의 회오리로 자진하기도 하지
저 속도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고 성큼 올라타
더 크게 울어버렸지
무지하게 차지해 버렸지
놀라 바라보는 눈 속에 붉은 강이 비치고

상류에서 하류까지
울분에서 자조까지

슬픔이 슬픔을 덮어 강 아니겠는지

이윽고 그녀에게
천천히 제자리에 돌아온

밤에게
강물에게

/ 그녀에게


대개 슬픔과 위로에 대한 키워드가 많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우리가 운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내 눈에서 눈물이라는 액체를 또는 물을 내보내는 일일 테니까. 신기하게도 향유하는 콘텐츠들의 유기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인데 엊그제 관람한 듄 1에서는 사막에서 사는 종족들이 첫인사를 할 때 침을 뱉는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물이 소중하기 때문에 내 몸에 물을 주는, 다시 말해 나의 소중한 것을 너에게 준다는 의미라고 한다.


작가의 위로는 괜찮아요 기운내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가 아니라 너의 슬픔에 나도 동참한다는 의미 같다. 나도 같이 울어 버리고 나도 같이 슬퍼해 버리고 그 슬픔이라는 감정에 깊이 침전하고 빠져들어서 슬픔 그 자체가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첫사랑은 예의가 없었다

밑줄 안에서 글자들은 숨죽이며 울었다

그리고

철대문은 사무치는 이름들을 부르며 닫힌다

공중에 뜬 난폭한 왕국이 하나

앞을 가리며

또 한 번 갇히며

/ 폭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 새끼들 부리에 넣어 줄 때

한 마리씩 차례대로

새끼는 새끼대로
노란 주둥이를 찢어질 듯 벌리고 기다릴 때

그 외에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노랑이나 목숨은
입구가 단단하여

절명이 그렇게 온다면

입을 벌리고 한 생각만 집중한 채

그렇다면 한 생을
정확하게 전달했는가

나는

/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몇 개의 독특한 제재들이 있다. 거즈나 감자 그리고 지독에 나오는 된장찌개 같은 것들. 시인의 주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나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죽음이라는 것은 정말 먼 미래의 이야기 같지만 또 의외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회자하는 것이 아닐까, 두렵지만 결국 만나게 되고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할 테니까. 이렇듯 죽음과 삶 그리고 물질적 제재들의 간극을 통해 화자는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이 시를 쓰는 시인조차도 자신의 글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그것이 두려워서일지도 모르고, 그것을 거부하고 삶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일을 소화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이런 감상을 적어 보는 것은 어떨지. 자아를 죽이고 나를 죽이는 것. 그것은 비단 육체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인 내가 나를 죽여 늘 나를 새롭게 만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 당신이라는 사람이 존재가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나라는 사람에게 주는 의미 또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의 삶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회귀도 좋을 것이다. 다시 첫 번째 문단으로 되돌아갈까 첫눈과 얼음과 흐르는 물을 통해서 이야기되는 것들은 확실히 감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실적인 것이며 동시에 예술로서의 감상을 느끼게 해 주는 글인 것이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독자인 나와 화자인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곱씹어 보기로 한다.


이 시의 마지막 장의 제목을 새삼 떠올린다. 나라는 존재를 읽고 시가 되는 것 또는 나라는 존재를 죽이고 하나의 객관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보는 것, 의미 있는 일이다.


저는 제가 없어진 줄 모르겠습니다.
이전 03화 즐거운 곳이 날 오라 하여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