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작품은 김민정 시인의 <벙어리장갑>이 아닐까 싶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라는 제목과 그 뒤에 나온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리고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모두 그녀의 시는 언제라도 불편하다. 그래서 더욱 좋다.
사랑할 때 우리 입은 늘 한 목소리였다.
사랑할 때 우리의 손은 늘 한 손깍지였다.
그로부터 벙어리 장갑 한 짝이 내 것이라 배달되었을 때
내 두 심장은 박수 치는 심벌즈처럼 골 때리는 콤비였다.
이는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아나 개야,
개나 물어뜯을 놀잇감 준비하느라 오래도록 당신 참 수고하셨겠다,
죽어라 그니까 개 줄라고.
/ 벙어리…장갑
처음 이 시집을 읽었을 때 매번 <곡두>라는 말이 나와서 이 포스팅을 하며 검색해 보았는데 아래와 같은 뜻이었다. 역시 멋진 글을 쓰려면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것들을 늘 곁에 두어야 하는구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곡두
요약: 눈앞에 없는 사람이나 물건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현상.
'곡두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삶의 허무함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금강경>에 '곡도는 이 것은 염이오'라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곡두의 옛말은 '곡도'이다. 꼭두각시에서 '꼭두'의 원말이 곡두이다. '환영', '신기루'따위 한자말에 갈음할 수 있는 우리말이다
/ 거울은 무한히 깊은 평면의 세계다. 그 속에 비친 나는 곡두처럼 무한한 공간을 떠돌아 흐른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슬프다 슬픈데 자꾸 웃는다. 그래서 꽤나 슬프지만 같이 웃을 수 있다. 영화나 노래 가사에서 본 것 같은, 눈물이 가득 차서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리고 눈물이 흐르지 않는 그런 표정을 짓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런 모습을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는 편이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늘 행복하면 좋겠다. 많이 웃고 많이 예민하고 많이 즐거웠으면 아프지 않고 오래도록 시인으로 남아 글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시인이면서 출판사 <난다>의 대표로 일하고 있는데 주변에도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전에 시인이 인스타그램에 썼던 글도 좋아한다. 시인의 가오를 지켜주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멋지고 대단하고 여성으로서 또는 그냥 한 사람으로서 정말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주변에 죽음이라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허수경 시인, 황현산 선생님, 김희준 시인 등. 죽음이라는 것에 크게 슬픔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그녀는 이 슬픔과 눈을 마주치고 응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마주한다. 그 부분 또한 이 시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웬만한 정신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슬픔을 응시하고 슬프지 않게 말하는 사람.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 그래주니 대낮게 막걸리 몇 통을 비울 수밖에요…… 거나하게 취해서는 구두 양손에 들고 맨발로 아파트 14층까지 계단을 걸어……내 집 아닌 누구의 집도 아닌 그 먼집에서 누구세요? 아 누구네 집 아닌가요? 죄송합니다……올라갈 때의 행방은 왜 내려올 때면 불명이 될까요…… 휘청휘청 현기증 짚기 허적허적 허방 딛기…… 살이 오른 꽃들에 허리 휘는 가지처럼 유연한 몸의 곡선을 섬기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그저 눈물만 났던 오늘…… 지겹다는 느낌이 슬픔인 걸 알아버린 오늘…… 언니가 멀리 있어 언니에게 부릴 수 있는 엄살…… 언니가 가까이 있으면 내게만 부리고 말았을 몸살…… 언니는 내게 왜 슬픔을 온몸으로 입어라 해서 이렇게 날 슬프게 할까…… 딱히 힘에 부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봄이어서 봄인 탓에 언니에게 부렸을 투정…… 봄이 전부여서일까 봄만 빼고 전부여서 그랬을 것도 같은데 그건 다 언니가 가르쳐 줘서 내 안에 허용하게 된 말줄임표 때문이라고 떼를 쓴 적도 그러고 보면 있었다 언니야…… 마침표라는 땅. 쉼표하는 하늘, 그 사이에 온전치 못한 우리니까 해보다 아니면 말든가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든가 할 수 있는 능동의 자유로움이, 그 천진이 우릴 시인이게 하는 걸거라고 맘껏 찍게 했던 점 점 점 여섯개…… 교과서대로라면 그다음에 마침표 찍는데 교과서대로가 아니라서 나는 그다음에 마침표 안 찍는다 언니야…… 점 하나의 추억과 점 하나의 사랑과 점 하나에 쓸쓸함과 점 하나의 동경과 점 하나에 시와 점 하나에 언니, 언니 언니야…… 혼자 갔을 먼 집에서 검은 바둑돌로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 놓아가며 먼저 놀고 있어라 언니야…… 그거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리다 만 얼굴로 배지 만들어 내 오늘 가슴에 달았으니 뾰족하여라 배지의 핀이여 넘어지면 찔려버릴 심장이기에 꼿꼿하게 직립하게도 만드는구나 언니야……
/ 수경의 점 점 점 ㅡ 곡두 22
함민복 시인의 <물어볼까>라는 시에 대한 화답으로 적힌 <난데요>를 함께 추가해 보았다. 함민복 시인의 경우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시는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라는 동시집에 있는 글이다. 조카에게 선물해 주기도 했다. 세계에 대한 시인들의 통찰력과 관찰, 그리고 깊이 있는 감상에 또다시 감탄한다. 가감 없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넓은 아량으로 자신의 세계를 독자에게 선물해 주는 시인들에게 늘 감사한다. 대단하고 멋진 발견.
인삼을 언제부터 인삼으로 알고 인삼으로 불렀는지 기억에 없지만(그러고 보면 우리가 우리말을 알아서 다 한다는 일이 좀 기적 같지 않은가요) 인삼을 인삼으로 알고 인삼으로 봤을 때 어쩜 이렇게 사람처럼 생겼을 수가 있는지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은 납니다 (중략)
인어는 왜 파일 몸의 절반이 물고기를 닮았는지
/ 난데요
인삼
인어
인형
눈사람
원숭풀각시
허수아비
마네킹에게
사람 닮아
자랑스러운 날이 더 많았니?
부끄러운 날이 많았니?
/ 물어볼까, 함민복
김민정 시인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정말 일상 세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새로운 발상이라고 느껴진다. 더불어 어렵고 난해한 단어들이 아닌 (이런 것들도 충분히 시라는 장르의 중요한 재료겠지만)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 주목하여 시인으로서의 본인을 성찰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드라마 보다 자막에 밑줄 그은 이야기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서 김영옥 할머니가
다리 저는 아들이 밤낮 결혼시켜달라고 조르니까
이렇게 말했다
야, 이 미친놈아,
밭일은 안 하고 밤일만 생각하는 새끼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서 이순재 할아버지가
택시로 함께 드라이브 나건 강부자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창밖 사람 구경혀.
어차피 평생 모르고 살다 갈 사람들이야.
/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하나 ㅡ 곡두 19
전단지 보다 크기 그거 소중해서 전단지 뜯어 온 이야기
인천 주안4동 재흥시장에서 키우던 하얀 진돗개를 찾습니다. 잠자고 일어나니 강아지 목줄이 날로 자른 듯 잘려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몇날 며칠째 슬피 울고 계십니다. 보시는 분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크기: 유치원 아이만 함.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둘 ㅡ 곡두 20
작년에도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도서전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난다 출판사에서 오은 작가와 김민정 작가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 떨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멀리에서 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사진이라도 찍을걸...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언제라도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정신 승리(?)를 하고 있다. 하하. 알게 될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늘 지금처럼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면 좋겠다. 행복하고 즐거우면 좋겠다, 꽤나 많은 글들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안위에 대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문득 떠올려 주기를 바라며.
모을 수 있으니까 그럼
꺼내 볼 수 있으니까
안 잊으려고 절대
안 잊히려고
가만두지 않는 게 아니라
가만히 두고 보려고
보면 볼 수 있음으로
이기니까
그 골무와 이 골무는
태생이 다르다는 걸 아는
덤덤함을 덤으로,
이겨왔지
무던함의 무덤
그 둥글넓적한 얼굴로
잘 자랐구나 잘 다 컸구나 너
/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 ㅡ곡두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