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영, 시차와 시대착오
알라딘에서 [시차와 시대착오]라는 작은 책을 받았다. 뉴 페이스 북이라는 주제로 만들어진 매거진 같았다. 제목이 멋들어진 것에 꽂혀 사은품으로 구매했는데 전하영 작가의 인터뷰와 함께 [경로이탈]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었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마음의 울림이 있어 이번 브런치에 적고 싶었다.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요?
영화관에 새 필름이 들어온다는 걸 의미하죠
/ 알베르 카뮈, 페스트
인간 존재에 대해서 생각했다. 존재한다는 것이 글의 서사 자체라면 어떨까. 1 인칭 소설의 난점은 우리가 당연하게 소설의 주인공이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생각해내려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머릿속에 어두운 방의 이미지 하나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걷다 보면 도착하리라.
언덕이라든가 가로등, 올리브색 벤치 같은 것들이 눈에 익었다. 그대로네 하고 소리 내어 말하고 싶어졌다.
그는 극장으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는 유리창 앞에서 멍하니 멈춰 선 채로 언젠가 읽었던 한 편의 글을 기억해 냈다. 소수의 인류만이 경험한다는, 심연과도 같은 깊은 단계의 수면 활동에 대해.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정 부류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정신적인 현상 ―몽유병에― 대하여……
참조: 이 몽유병자는 칼리가리에게 돈을 지불한 사람들의 미래를 예견해 준다. (……) 그들의 보는 행위는 목격될 것이고, 그들의 최면 상태는 원격 조정될 것이다.
영사기 이야기를 통해 이것이 영화의 일부라는 것을 떠올리며 결부시키게 하면서 동시에 '그'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이어서 미술관에 도착한다.
몽유병이라는 소수의 인간만 경험한다는 질병은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몰입하는 과정이 일종의 몽유병 같다는 환상과 결을 같이한다. 깊은 잠에서 깬 기분이야말로 현실로의 복귀일 것이며 이것이 '그'에게 긍정적인 의미인 것인지, 현실인 줄 알았는데 꿈이었던 그래서 꿈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오히려 더 나은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본다.
물론 그런 혼란과 무정형성 자체가 설계자의 기본 취지였다고 추측함이 타당할 것이다.
늙은 영사기사가 들려준 괴담
그중이 업계에서 가장 선호되는 것으로는 실현되지 못한 천재 건축가의 독창적인 설계 같은, 약간의 비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비화가 있다. 그러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
밝은 스크린
단체로 돌입한 최면 상태. 개별적인 광기와 망상들이 하나의 시선으로 수렴되는, 영화 관람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취미. 이 모든 동시적 사태의 아름다움이 경이로웠다. 이것은 매일 오후 네시 무렵 극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괴담'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깊은 잠에서 깬 기분이 들었다.
어떤 사람의 반복되는 삶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는 삶 속에서의 소소한 변화와 일탈이 있다는 이야기로 글을 이해하며 읽어 내려갔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는 괴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많은 이들이 계속 찾는 이야기이자 누군가의 삶이다.
괴담이라는 키워드가 주는 것은 '약간의 비극적 요소가 가미된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비화'를 삽화의 형식으로 엮어내며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서 떠올린다.
점심시간만큼은…… 혼자됨이 필요하다. 일할 때도 그는 대개 혼자였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종류의 혼자였다. 오픈된 공간에서, 자신을 모르는 타인들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밀려드는 아늑한 종류의 혼자. 태양빛 아래서 나른한 현기증을 동반하는 혼자. 조금쯤 시를 쓰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혼자.
시를 써볼까……
시.
시 같은 것.
나는 시를 썼었나.
시를 써왔던 걸지도 모른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왜 갑자기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떠올렸는지?
최사해는 자신에 대한 생각에 골몰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모든 사물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로 애를 쓰지 않았는데도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무심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어릴 적 가장 아끼다가 잃어버린 구슬을 발견했을 때처럼. 상상의 주머니에는 빛나는 구슬 하나와 그것이 빠져나가지 않을 만큼 작고 검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블랙홀 같은 구멍과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삭제된 기억들.
그리고 어떤 거리감
잠들기 전엔 분명 스물셋이었는데 깨어나니 사십육 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계와 거리를 두고, 가난한 기분으로 혼자 서 있었다.
'가난한 기분'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 단어가 좋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 개의 단어들이 나의 마음을 울렸는데,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라기보다 정말 감동적이었다는 의미이다. '시를 쓰는 노트'와 '시'를 쓰고 싶어 했었던 과거, 그리고 지금은 잊혔지만 그때는 중요했던 '문장'에 대한 서사.
기질…… 그는 자신의 기질에 대해 생각하길 좋아했다. 그것만으로도 하루종일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스스로를 견딜 수 없는 척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도무지 변할 줄을 모른다.
그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기분으로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서늘한 벤치에 반쯤 걸터앉았다가, 이물감을 느끼고 일어나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노트를 하나 꺼냈다.
맨 앞 페이지에는 "나는 무작정 걷기를 좋아한다. 거리의 이름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는 문장
한때 그의 마음을 대변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 출처를 완전히 잊어버린 문장이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출입증을 살펴보았다. 어느 틈엔가 그것은 목에 걸려 있었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경미한 뇌졸중. 각성된 상태의 기면증. 감염병이 잦아들고 찾아왔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면병의 대유행. 인류세의 대단원에 들이닥친 난데없는 멜랑콜리. 지금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생각해내고 싶다.
나는 아주 예민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다. 섬세하고 바보 같은. 아주 잘생기고 늠름한 어지럼증.
여자의 등장으로 소설은 일련의 트루먼 쇼가 된다. 자아를 가진 남자는 캐릭터성이 두드러지고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일종의 낭만을 아는 그의 서사는 [경로이탈]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술관에는 일시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여자는 어쩐지 눈에 띄게 놀라며 그의 시선을 피한다.
경로 이탈인데.
어느샌가 곁으로 나가온 여자가 머리를 낮추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엄격한 목소리여서 최사해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이상하게도 여자 앞에서는 수동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 같았다. 얌전하게, 그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기분. 선선히 투항해야 신상에 이로울 거라는 느낌. 무력함과 긴장. 그는 서서히 마비된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상한 안정감이 뒤따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신이 그녀의 일부였다는 느낌.
왜 자꾸 오류가 나지?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네.
매핑인가? 타임 테이블?
시스템과 일련의 구조는 일상이라는 큰 틀 안에서도 미시적인 관점과 접근을 통해 그것이 의미 있다고 초점화한다. 그것이 이 소설의 형식적인 특징이고 소설을 구성하는 장치의 일환이며 장르 자체의 역할이다.
극장을 내려다보던 두세 명의 사람들은 속으로 일제히 '유령'이라는 글자를 떠올렸다가, 떠올리기를 그만둔다.
최사해는 이십삼 년간의 잠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는 중이다.
그는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퀭한 얼굴로 가난하게 서 있다. 그는 '가난하게 서 있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기뻤지만 노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내 슬픔에 빠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네 시에는 그날의 영화가 상영된다. 관객들이 오기 전까지 그는 자리에 앉아 대기하며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망각과 망상 사이에 존재하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무섭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해서.
영화가 끝나면 영화가 시작된다.
밤과 끝, 고요와 정적, 몰락과 붕괴, 환영과 환강, 무너진, 그리고 펼쳐진 극장……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다. 그는 간신히 어떤 패턴을 찾아내고야 만다. /접을 수 있고, 휘어질 수 있고, 통과할 수도 있는/ 기억의 물결들. 그것은 일종의 움직임이면서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빠르게 형질을 달리하면서 동시에 그 무제를 일정히 유지하는 어떤 물리적인 현상화도 같았다
노트가 하나 더 필요할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꿈을 기록할 만한 고트다. 그는 거기에 '최의 사례'라는 이름을 붙여줄 것이다.
모든 것은 결국 이야기로서 허구성을 띄게 되지만 일상을 살면서 느끼는 소소한 행위와 생활성에 공감하고 또다시 살아감에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에 의한 삶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존재는 자기만의 서사를 창출하고 창조해 낸다. 멀리에서 보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주 가까이에서 밀접하게 곁에 달라붙어 보는 시야를 가지게 된다면 이 세상도 꽤나 괜찮은 것 같다고 느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