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크로캅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인데 종종 꿈을 꾸면 메모장에 남겨 두는 편이다. 왜인지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말을 믿는 편이기도 하고 그때그때 모아서 다시 되돌아보면 나의 심리 상태도 잘 알 수 있는 법이니까. 크로캅을 읽는 중에 꿨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적어 본다.
국가대표 격투기 선수로 나가서 발차기 연습을 많이 했다. 친숙하고 친밀한 분위기였다. 그 안에서 다들 나를 응원해 줘서 즐거웠다.
짧은 문장의 호흡이 글의 몰입감을 준다. 독자는 경기장의 관객이면서 크로캅이면서 그의 매니저이면서 동시에 팬이 되어 본다. 서사의 힘은 내가 얼마나 그 글에 들어가 동화되는 것인가에 있다고 본다.
친구의 말을 빌리지면 책을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하던 대화를 떠올려본다. 잠시 한눈을 팔면 놓치게 되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사용되는 단어들도 대게 직관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장욱 소설 읽기의 특수한 방법이 아닐까.
물론 당신은 먹잇감이 아니다. 죽은 동물도 아니다. 죽음이 가깝다고 해서 누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당신은 생물이다. 생물. 살아 있는 물질……. 지금도 당신은 적의로 팽창할 수 있다. 원한으로 들끓을 수 있다. 분노로 폭발할 수 있다. 마침내 반격할 수 있다. 왜냐하면……살아 있는 물질이기 때문에.
소설에 적힌 단어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비가역적인]이라는 말이다. 사전의 뜻을 본다면 [화학반응에서 정반응만 가능하고 역반응이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환경에서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앞만 보고 달린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다. 직선적이고 투철하게 세상을 직면할 줄만 아는 사람. 유연성이 없고, 구부러지느니 부러지겠다는 사람.
“일생을 옥타곤 안에서 살아왔다고” 느끼는 노인 둘을 등장시킨다. 낡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과거,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 한쪽은 노조원, 다른 한쪽은 사주의 편에 섰던 인물로 서로 대립적 위치에서 지금도 창살과 방범용 카메라를 설치해 서로를 경계하며 지낸다. “옥타곤의 적은 실은 동료가 아닌가”라는 인식으로 마무리되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의 능수능란한 서사 기법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 윤대녕 소설가
그리고 [살아있다]는 단어에 주목해 보았다. 살아있다는 건 생명줄을 달고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삶의 의미를 구현하는 자아 실현의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의 의미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목적성을 전환하고 변환시키는 것에 접근하지만 다시 말해 이 목적성이 완전히 상실되고 없어진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육각형의 케이지 안에 두 명의 전사를 가두어 놓고 승과 패를 나누는 결투, 혹은 그런 결투를 바라보는 현대적인 콜로세움을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알레고리로 제시한다. ‘전성기가 지난 파이터가 결국 리벤지 매치에서도 패배하는구나’ 절망할 때쯤 일어났던 그 극적인 반전을 경쟁과 대립으로 잔혹스럽기 짝이 없는 현실과 깔끔하게 엮어 낸다는 점에서 작가의 탁월한 능력을 잘 보여 준 작품이었다. 거칠 것 없이 나아가는 문장이야말로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 김종욱 평론가
어쩌면 삶의 목적성을 가지기 위해 섀도우 복싱이라고 하고 사는 것이 삶의 이유를 찾는 방법이고 생존 방식일 수도 있다. 소설은 이에 대해 등장인물들의 관계성을 역전함으로서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그것이 이장욱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장욱의 펀치와 하이킥이 이토록 날카롭고 집요하게 치명적일 줄이야. 그동안 이장욱의 소설은 나에게 국어 시험의 ‘지문 같은 거’였다. 왠지 읽고서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았는데, 출제한 선생님(지적으로 짓궂은 선생님이어서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이 바라는 답이 무언지 확신할 수 없어 내깐에는 찾아 놓고도 제출하기 망설였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코를 바투 대지 않아도 작품에서 엘보와 발길질이 날아와 나를 확실히 가격했다. 질문과 답이 마치 자웅동체인 양 소설 안에서 분명해졌다는 것인데 얻어맞은 데가 아파서였는데 차라리 안 아팠던 때가 살짝 그리워졌다. / 구효서 소설가
옥타곤 안에서 벌어지는 격투기는 승패가 분명하지만, 일종의 게임에 불과하다. 그러나 회사에서 벌였던 싸움은 그 갈등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제거되지 않을 경우 서로 원한을 낳고 각자의 삶을 파괴한다. 소설적 결말에서 결코 ‘우리’가 되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는 두 사람의 삶에 대한 환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 권영민
그러나 결국, 다들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싶다. 그렇게라도 살고 싶다는 몸부림. 치열한 투쟁의 일시정지는 그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이 싸움을 진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