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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Jul 17. 2024

명백한 허무의 희망

이영주, 육식을 하면




나는 날개를 펼 수 없는 죽은 천사 이야기를 좋아했다 해 질 녘이면 난로 위에서 기름이 끓었다 나는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물을 삼켰지 언니는 도마를 두드리다 말고 젖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언니는 식당을 폐업했다 창고 안에서 남은 고기들이 천천히 녹아가고 있을지도 몰라 언니는 가끔 훌쩍거렸다 시간은 창고 안에서 깊어지겠지 언니는 열심히 고기를 썰었다 다른 생물의 살을 만지고 썰다 보면 나이를 빨리 먹는 느낌은 뭘까 손이 큰 언니는 무엇이든 잘 만들어냈는데 이 살은 왜 이렇게 익숙하고 부드러울까 언니는 따뜻한 물로 내 손을 씻겨주는 것을 좋아했다 약하고 약한 살이 이렇게…… 언니가 중얼거리며 대야의 물을 버릴 때마다 핏물이 흘러내렸다 따뜻해라 나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는 한낮 오래전 공장 사람들이 폐업한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창고 안에서 깊어지다 보면 우리는 말랑말랑해져서 서로를 더듬었다 단단한 뼈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서로의 살만 확인하다 알 수 없는 시간으로 들어갔다 죽은 후에도 녹으면서 흐르는 것이 있다는데 날개가 부러진 언니는 식당을 폐업하고도 계속

/ 육식을 하면


화자는 [날개를 펼 수 없는 죽은 천사 이야기를 좋아했다] 완벽한 실패의 긍정, 좋아했다는 의미는 일종의 기호의 관점일까? 가벼운 의미로 실패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가게를 그만두고 창고에 쌓인 고기의 녹는 슬픔을 생각한다. 생업의 마감과 함께 끝을 대하는 언니의 태도를 본다. 이로써 끝난 결말에 대해서 슬퍼하는 사람, 슬픔의 정서를 가감 없이 표현하는 사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그 일을 할 때, 특히 [고기를 썰 때] 언니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가에 대해 떠올려본다. 더불어 죽은 후에도 녹으면서 흐르는 것이 마치 그녀의 눈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기를 썰며, 다른 생물의 살을 만지고 썰면서 그 살은 무척이나 [부드럽다] 이것은 내 손의 촉감과 동일한데, 언니가 내 손을 씻어 줄 때 또한 핏물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폐업 후 녹아 흐르는 고기와의 이미지가 병치되며 부드러웠던 고기는 결국 썩어 버리지만, 그래도 언니는 고기를 썰고 내 손을 닦아 준다.


언니는 마치 날개를 잃은 천사인데, 본인도 패배자이며 낙오자임에 불구한데도 허무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마치 화자인 나와 언니는 대립되는 이미지다. 하지만 날개가 부러진 언니는 계속해서 자신의 할 일을 한다. 명백한 허무라 하더라도 이를 극복, 회복해 보려는 노력의 의미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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