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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Aug 15. 2024

젖으면서 가까워지는 것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날아오르는 액체 속에서 흰 종들이 부딪는 소리가 들려. 너는 내 비밀을 적어둔 눈송이를 데려다 어디에 버려두었니. 어제는 비가 내렸고 오늘은 눈이 내리는데. 얼어가는 세계와 녹아가는 세계 중 어느 쪽이 더 슬플까.     

/ 날개의 맛     


비가 많이 오는 날이 주는 분위기는 뭐랄까, 늘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물 먹은 솜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비를 맞으면 [젖는다]는 말을 우선 떠올려 본다. 젖는다는 건 가까워진다는 의미이다. 비와 내가 가까워지는 것처럼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 또한 가까워지는 일이리라.     


이를 바탕으로 이혜미의 시에서 비는 물로 의미를 확장하며 익사하는 길로 빠져든다. 어차피 죽는 거라면 ‘아름답게 망하고 싶어’라는 말과 같이 죽는 것과 망하는 것은 동어 치환이 될 것이다. 죽음으로서 비에 젖었던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그곳은 나의 영토이지 너의 시간이 아니야. 너의 다정, 너의 귀가, 너의 얼룩진 셔츠 소매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고 무른 손가락들.     

우리는 아름답게 걷는다. 근사하지만 하나는 아니야. 우산이 언제나 비보다 느리듯 생각은 늘 피보다 느리고.     

근사하다는 건 가깝다는 것. 나는 하얗고 너는 희다. 나는 혼자이고 너는 하나뿐이다. 비슷하지만 같은 건 아니야. 우리는 서로의 지붕에 지붕을 보태며 지속되는 빗속을 조금쯤 가깝게 걸어간다.     

/ 개인적인 비     
몸의 모서리에만 깃드는 악천후다 번져가는 숲 속으로 새 떼들이 몰려들면 가장 멀리 보낼 것일수록 깊이 당겨 안는 마음은 무엇일까 소용돌이치는 몸의 중력은 아직 품속에 있는데     

접질린 팔의 바깥을 몸에서 빗겨 난 마음이라 부를 때     

기왕이면 아름답게 망하고 싶어     

파국을 기다리며 기후를 탕진하는 동안 몸 밖으로 투명한 통증이 뚝뚝 흘러내린다 익사한 식물의 발처럼 검게 젖은 실타래를 풀고 또 풀면 마음을 멀리로 보내기 위해 한껏 휘감기던 피의 중심이 있다 떨리는 활시위처럼 투수의 병든 어깨처럼     

멀어진다
사랑받았던 속도로 그만큼의 힘으로     

/ 엘보


작가의 글인 시의 주제를 관통하는 제재는 바로 사랑이라 믿는다.  비에 젖는 시간은 축복이고 사랑이면서 동시에 익사하는 모순된 상황과 맞물린다.     


누구라도 선호할 사랑을 받는 것보다 두 사람이 ‘어차피’ 사랑해야 한다면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사랑에 힘껏 취하는 것, 흠뻑 젖는 일에 과감히, 가감 없이 뛰어드는 일.          


그것은 사랑의 시작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결국 이 모든 경험, 감각은 사건의 시작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잠든 이의 코에 손을 대어본 사람은
영혼을 믿는 자다 깊은 밤,
숨은 수풀을 지나 진창에 흐르고
깊이 젖어 고단한 채 돌아온다     
가볍고 약하고 투명하게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심연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얼굴을 지운다
뒤섞여 드리우는
점차 짙어지며 스며드는
공기의 매듭들     

/ 숨의 세계
동시에 포옹하는 두 손은 서로의 박자를 의심한다     

/ 간절     
귓바퀴를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졌지. 미묘한 요철을 따라 흐르는, 그런 혀끝의 바닐라.     

수없이 많은 씨앗들을 그러모으며 가장 보편적인 표정을 지니려. 두근거리며 이국의 이름을 외웠지. 그건 달콤에 대한 첫 번째 감각.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각별한 취향.     

녹아내리는 손과 무릎이 있었지. 차갑고 뜨겁게 흐르는, 접촉이 서로를 빚어낼 때. 소리의 영토 안에 나는 세로로 누운 꽃. 손끝에서 점차 태어나. 닿아 녹으며 섞이는, 품이라는 말.     

그런 바닐라. 적당한 점도의 안구를 지니려. 모르는 사람을 나는 가장 사랑하지. 잃어버리는 순간 온전해지는 눈꺼풀이 있었다. 순한 촉수를 흔들며 미끄러지다 흠뻑 쓰러지는.     

/ 뜻밖의 바닐라          


어쩌면 사랑은 여름과 같다는 은유를 활용해 본다. 사랑과 여름의 공통점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해 볼 수 있겠지. 축축하고 끈적한 습기가 가득한 팔을 쓰다듬는 손바닥 같은, 또는 청량하고 밝고 가벼운 지금 당장 뜨겁고 가느다란 햇볕과 날아갈 것 같은 산들바람도 좋겠고 바람 한점 없이 정지된 채로 이 세계를 가득 채우는 수증기의 부피감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지. 여름은, 사랑은,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똑     

사람을 부르는 소리다 귓가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런 적이 있었지 소리만으로 다정한 이를 부르던, 톡 하고 부드럽게 이마를 치면 감았던 눈을 뜨고 올려다보는     
눈동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노크 소리가 난다
나는 바라본다 초점을 흐리며 몇 겹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네가 후 – 바람을 불어넣자
열린 문 틈으로부터 여름이 시작되었다     

/ 노크하는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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