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목, 식물원
[식물원]이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나무 이야기로 시를 쓰고 사진을 사용해 일종의 전시회처럼 배치한 부분이 신선했다. 사진을 보며 감상을 하기가 다소 어려운 감이 있었으나 뒤를 이어 따라 나오는 글들이 아주 좋았기에 괜찮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고, 그중에 어떤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자주 고개를 숙였고, 남몰래 주먹을 쥐었고, 그러다 하품을 하였고, 이대로 끝이 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지루함을 견디며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다른 것이 아닌 그는 종려나무인 것이 좋았다. 길고 가느다란 잎과 뾰족한 끝이. 찌르기 전에 꺾이는 무력함이. 천천히 말라가는 목숨이. 때로 휩쓸리는 삶이. 여럿이 모여 있으면 징그럽기도 한 것이 좋았다.
/ 종려나무
예수님을 환영할 때 흔들었다던 종려나무를 떠올려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입성을 축하하였으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무렵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축복을 모두 잊었다.
사랑이란 ‘더럽고 징그럽고 죽이고 죽고 싶은 것’이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 대한 안온함과 그의 평안을 바란다는 점에서 사랑은 언제라도 모순적이다. 과한 해석일지 모르겠으나 예수와 인간의 관계에서의 사랑이 그런 것 아닐까? 그리고 잔인한 사랑일지라도 늘 그것을 시도하는 것, [망그로브]와 [유목]을 통해 그런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로부터 한참을 떠 있었다
귓속으로 물이 흐르고
저것은 새이다
위를 적시고
저것은 구름이다
아래로 빠져나갔다
뒤집혀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물 밑에는 그림자가 누워 있었다
몰랐는데 죽은 거 같더라고
내가 본 것을 말하면
그는 내 눈을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 망그로브
먼바다를 헤엄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것을 만나게 됩니다. 이게 나를 죽일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 다시 바다에 나가는 일을 망설이게 되죠.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
위로가 되던가요?
여기 두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사랑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망설이는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유목
[망설이는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망설임의 긍정성은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망설이는 상황이 계속됨으로써 사건의 지속성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결국 누군가의 안위를 바라는 마음도 사랑이다. 고통을 감내하고, 또는 함께 나누고 더불어 그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것들 모두가 사랑일 것이리라.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는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어머니는 베란다에서 벤자민에 물을 주고 있다. 나는 어항의 물이 줄어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어머니, 물이 줄어든 것 같아요. 어머니는 벤자민에 주고 남은 물을 어항에 따랐다. 어항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손자국이 남잖니.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의 벤자민은 길고 두껍고 무성했다. 어쩜 이렇게 잘 자랐을까요?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그래요. 어떨 땐 좀 징그럽더라구요. 그래요? 어떨 땐 그래요. 마냥 좋지만은 않아요. 나는 벌써 얼마나 죽였는지 몰라요. 벤자민을 죽인 사람은 나뿐일걸요. 나도 처음엔 여러 번 죽였어요. 자꾸 죽으니까 싫더라구요.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나 싶고 왜 그렇잖아요. 어머니는 벤자민 바구니를 천장에 매달 때 발꿈치를 들어 키를 높였다. 어머니, 제가 걸어 드릴까요? 어머니는 괜찮다고 말한다. 나중에, 나중에 해주렴.
그때는 집에 어항이 있었다. 다른 집에도 어항이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물고기는 한 마리만 남아서 구석에 가라앉아 있었다. 모서리를 두드리면 조그만 입을 뻐금였다. 언제부터 이랬니? 모르겠어요. 이제 곧 죽겠구나.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는 다시 떠나고 싶었다.
/ 벤자민
어머니가 키우는 벤자민은 자꾸 죽었고, 죽는다. 그렇게 벤자민은 늘 죽지만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벤자민을 키운다. 언젠가는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키워낸다. 양육자의 모습으로서의 어머니는 끈질기기까지 하다. 하지만 식물의 입장에서 죽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는 또 다른 식물이 나타나고 또 죽었다가 이제야 제대로 키우게 되었을 때 떠나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는 자식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키우는 사람과 키워지는 사람의 간극을 본다.
책의 제목으로 돌아가서, [식물원]에 있는 다양한 나무와 식물들은 분명 작가에게 귀감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기쁨, 황홀, 또는 깊은 고뇌와 깨달음은 가히 신성하다고 느껴진다. 자연은 누군가의 보살핌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성장한다. 어쩌면 나무가 의인화 한 작품들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작가 또한 자연을 매개체 삼아 인간을 이해해 보려고 했던 노력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결국 책 읽기와 글 쓰기는 모두 인간을 알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