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여름과 루비
무언가에게 뒤를 밀리듯이 글을 쓴다는 건 뭘까, 자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내가 매주 수요일 글을 쓰겠다고 한 것은 내 선택이기 때문에 자의적이다. 그러므로 일전에 읽었던 [여름과 루비]를 원래의 형식대로 또 써 보기로 한다. 줄거리를 줄이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하고 어떤 문장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은 꽤나 까다롭구나, 생각한다.
과거를 생각하면 슬프고 현재를 떠올리면 입을 다물고 싶고, 미래를 생각하면 씩씩해져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만약 무언가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이야기의 손가락 몇 개, 발가락 몇 개, 잘해야 이야기의 뒤통수나 목덜미 정도일 게다. 운이 좋으면 이야기의 뒷모습이나 윤곽 정도를 보게 될까. 그렇지만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의 전체라는 건 관념이다. 사랑이나 미움처럼. 그것은 다르게 존재한다. 온전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이제 루비를 잃어버린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정돈이 필요해?”
“네 옆에 앉을 수가 없어.”
“그럼 앉지 마”
“루비, 너는 왜 점점 네 맘대로 하는 건데?”
“내가 뭘? 놀고 싶으면 나가 놀아. 네 친구들하고. 내가 밖에 있었어도 이럴래?”
이 말에 상처받은 건 나다. 루비가 아니라 내가 상처받았다. 나는 친구가 많았고 루비는 나 말고는 친구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비밀 속에서만 친했다. 너무 오랫동안 루비는 내 삶의 내벽을 이루며 커졌다. 밖에서 부리는 늘 혼자이고 침울하고 두려움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걸 모른 척, 보이지 않은 척했다.
/ 난삽
나에게도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다. 우리는 식성도 조금 다르고 성격은 매우 다르다. 하지만 어떤 의미의 '취향'이 비슷한 편이다. 고등학교 그리고 이십 대에 나는 그 친구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꽤나 노력했었던 것 같다. 며칠 연락이 없을 때, 거의 한 달이 되었을 때에는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친구가 잘 지내느냐고 물어봤었는데 친구가 그런 걸 왜 물어보느냐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는 걸, 이해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머리가 다 자란 고등학생, 이십 대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라는 존재가 꽤나 의미 있는 것인데 어린 여름과 루비에게는 어땠겠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에는 언제라도 시간과 공간의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 필요하고 어쩔 때는 기약 없는 기다림도 존재하는 법인 것 같다고,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서야 자연스럽게 경험치를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금붕어 이야기도 매우 인상 깊었는데 새엄마의 언니(이모)의 아들이 계란과자를 주겠다고 어항에 과자를 넣어 기름이 둥둥 떠다니고 금붕어마저 죽게 했다. 여름은 소리치고 싶은 충동에 빠지고 이내 소리를 치지만,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과자를 주고 싶었나 봐, 깔깔깔. 오히려 과자를 준 아들의 심성을 칭찬한다. 자기 자식의 생명이 소중하듯, 금붕어가 가진 생명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에 기함한다. 잔인하기 그지없다. 여름을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현실을 수정한다.
‘못생긴 그림’처럼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모호한 말이란 건 안다. 내 기준에서 못생긴 그림이란 물감이 덕지덕지 뭉치고 섞여 저희들끼리 끔찍한 포옹을 하고 있는 그림이다. 바라보는 쪽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엉망진창으로, 저희들끼리만 행복한 그림. 그건 대체로 못생긴 그림이지만 저녁 8시엔 고즈넉해지고, 자정이 넘으면 우아해진다. 그때를 빌려 감상해야 하는 그림. 아침이 되면 평범해지고, 그 밖의 시간엔 여전히 못생긴 그림. 루비와 보낸 어떤 시간들이 그랬다.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읽거나 썼고 말하거나 들었다. 심심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내가 이야기의 결말을 지어내다 말고 이런 말을 했다.
“자꾸……따뜻해져야 한다는 걸 잊어.”
“따뜻해야 좋다는 걸 잊는 거겠지.”
“달라?”
“달라. 따뜻해야 할 필요는 없어.”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이 루비가 말했다.
루비의 말 덕에 나는 자유를 얻었다. 내 이야기의 끝에는 학원에 가기 싫어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어린이가 등장했다. 가출해서 세상을 떠돌다 나쁜 사람 두엇을 죽이고, 죄책감으로 자살해 버리는 어린이가 나왔다. 자유의 끝판왕은 죽음이란 걸 어린 내가 알았을까. 루비는 일일이 평하진 않았지만 내 글을 다 읽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성인이 된 사람에게 또는 한 사람이 커가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책의 이야기이며 허구의 인물들,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누구라도 어린 시절에 또래 관계에서 고민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에 공감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특히 여자 아이들의 경우가 더욱 그런 것 같다.
“슬픔으로 타격을 받은 자에게 말은 무겁고, 의사소통은 위험하며 삶은 하찮아지나니. 이것 참 여러 가지로 난감하군요.” 이렇게 말할 능력이 내겐 없었다. 필요한 단어는 다만 한마디. 배신자. 만 오 년 즈음을 살아온 내게 그 순간 필요한 말은 그뿐이었으나 문장의 효용이나 단어의 의미를 고를 여유가 없었다. 슬픔과 슬픔 사이, 새로운 슬픔이 태어나 말을 밀어냈다. 밀려난 말은 밀려나는 속도에 되밀려 일어서지 못했다. 태어나지 못한 말은 태어날 기력이 없었던 거다. 긴 문장도 짧은 문장도 슬픔 앞에선 어렵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할머니는 늙은이임에 불구하고 매일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다. 고모는 험한 일 한번 해 보지 않은 어머니(할머니)를 타박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해 꽃을 사는 남편처럼 보이지만 늦은 밤 나는 본다.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방의 끝에서 끝을 오고 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그렇게 할머니는 미국 고모할머니댁에 가게 된다. 나에게 말도 없이. 다섯 살의 소녀가 느끼는 상실과 슬픔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아는 단어가 없어 외치는 단어는 고작 ‘배신자’인 것이다.
밤, 더위, 쓸쓸함이 몸에 달라붙었다. 엎드려 이 생이 주는 가혹함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십 년도 채 안 살았는데 삶이 바닥을 보여주다니. 단맛, 짠맛, 신맛 따위는 있으나 마나. 내겐 씁쓸함과 아린 맛, 혹은 무미, 그런 게 다였다. 개미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 가슴 배. 두려웠다. 여섯 개의 다리로 걸어오는 것. 더듬이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것. 나에 비해 너무 작은 것. 내 손끝에서 당장 끝날 수 있다는 것. 끝나도 끔찍하게 많은 개미들이 그 뒤를 줄지어 지날 거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나를 깨물 수 있다는 것.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길이 다르며, 무엇 하나 나눌 수 없다는 게 무서웠다. 나는 이불을 몸에 휘감고 떨었다.
/ 할 수 있는 이야기
여름은 여덟 살임에도 불구하고 글에 서사되는 생각의 내용은 매우 풍부하고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일종의 망상이나 상상 같은데 몰입도가 있다. 어쩌면 작가가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겠지 싶어 약간의 거부감이 들곤 했다. 하지만 퇴근 후 돌아와 샤워를 하며 문득 생각했다. 믿기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분명 그때 깨달았다. 초등학교 3 학년 열 살이던 시절, 혼자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공원의 길가를 걸으며 ‘인간은 왜 태어났을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개인의 추억과 서사는 갑작스레 떠오르기 마련인가 보다, 여름을 보며 어린 녀석이 어른인 척하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린 시절의 나도 그런 아이였다는 것을.
여름과 루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왜 어떤 사랑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묻게 된다. 사랑의 실패는 외롭고 힘들다. 별안간 혼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있던 언덕에서 내려와 각자의 언덕으로 가는 일이다. 루비가 학교 아이들의 놀림과 장난, 괴롭힘으로 힘겨워할 때 여름은 루비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루비가 여름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켜주지 못했었다. 유년의 소심함과 불안이 사랑의 말을 막아서도 도망치게 했다면, 이별은, 다른 언덕으로의 이사는 그 말들을 끌어당겨 제자리에 도착하게 한다. … 비록 실패해야 하지만 바로 그 실패로 인해 더욱 고귀하게 사랑하게 되는 비극적 운명 말이다. 유년의 사랑, 성장이 아픈 이유는 바로 그래서다. 유년의 사랑은 실패하는 여름이다.
/ 전승민 평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계속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마주한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겪어왔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같다. 너무나 낙관론적인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어떨까, 하는 상념에 문득 젖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앞으로 내가 겪게 될 만남과 이별을 잘 소화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고 그런 어른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유년’이라는, 벗을 수 없는 옷을 입은 채 커버린 사람 곁에 서 있고 싶다.
2022년 여름과 루비 곁에서,
박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