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지 Sep 11. 2024

그녀라는 대명사

정세랑, 섬의 애슐리


    

소설 속 주인공은 많은 직업과 일을 하면서 결국 섬이라는 공간에 들어와 전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전통 춤을 무표정으로 추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공감의 표시를 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일하면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소명 의식이니, 책임감이니 그런 것들이 필요한 ‘전통’을 기계적으로 복원하는 삶에 대한 묘한 기시감의 공감이었다.


본토 사람들의 오만한 태도는 애슐리에게 계속 섬에 살 것인지 왜 이런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묻는 가족들로 대변된다. 이렇게 섬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주는 반대의 개념은 본토이다 그런데 본토에 화학 공장이 터지면서 본토 사람들은 섬으로 오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휴양으로 가끔 들르던 곳을 자신들의 생명을 이어가야 할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그때 애슐리가 조난된 아이를 씻기는 사진을 외국인 사진작가 리가 찍게 되면서 애슐리는 요즈음 말로 인플루언서 같은 유명인의 대열에 들어선다.


사람들이 애슐리에게 관심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내용에도 번번이 등장하지만 인류애는 스타성을 가지기 쉽게 대중성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쉽게 말해, 또는 숨기고 싶었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동정’의 일환일 것이다. 종종 누군가를 불쌍히 여길 때 생각한다, 남의 불행을 슬퍼하는 것만큼 남의 행복을 기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처럼 애슐리 주변의 사람들, 다시 말해 대중들은 애슐리에 열광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호응에 완전한 긍정의 의미를 읽지는 못했다. 마치 애슐리에게 바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소위 ‘섬 출신의 애슐리’가 ‘아이를 돌보는 일’과 맞물려 그들이 소비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뚜렷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애의 단편일 수 있으나 자칫 잘못한다면 대중을 현혹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애슐리 또한 이러한 이미지의 소구를 인식한다. 그녀는 훗날 본인의 이미지가 탄로 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필요가 없어지면 사라질 것이라는 미래까지 염두한다.


그렇게 애슐리는 섬의 유명 인사인 아투라는 청년에게 공개적인 구혼을 받는다. 애슐리는 생각한다 정말 자신에 대한 사랑일까 그저 이용당하는 것뿐일까. 결국 본토의 공사가 끝나고 섬의 갯벌까지 콘크리트 작업을 하던 아투는 실패에 빠지게 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반짝 성공을 노릴 수 있었던 공간인 섬도 금세 열기가 사그라든다. 실패에 대한 예견을 한 아투는 결국 애슐리를 죽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때도 애슐리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해탈이라는 관조의 개념이 아닌 수동적인 삶에 독자인 나 또한 무기력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내가 주목받는 일에도 무관심한 것에서 더 깊게 침잠하여, 자기 자신도 포기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만 훗날 노년의 아투가 애슐리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접받으며 죽을 것을 생각하니 폭로의 전선에 선다.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애슐리라는 이름의 기원으로 돌아가자면 아빠와 새엄마 사이에 셰인이라는 동생을 가지게 되는데 섬 안에서 SH 발음을 가진 이름이 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 셰인은 매번 애슐리를 보며 ‘허 huh’라는 단어를 종종 외친다고 나오는데 이것을 her이라고 했을 때 지시대명사인 her, 그녀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성이라는 잣대로 얼마나 많은 편견과 요구가 강요되는지 떠올린다. 그렇게 마지막 문장을 인용한다면 ‘이번 섬에서는 어떤 이름이 유행일까’ 결국 애슐리라는 만들어진 고유명사가 아닌 여성으로서 또는 그녀로서의 개인적인 명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이전 22화 그때 우리가 나눈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