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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Oct 23. 2024

무의미의 유의미성

정한아, 울프 노트


아무래도 책을 읽는 시기와 과정, 방법은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어렸을 적 내가 이십대였을 적에 구매했을 법한 책들을 돌아보며 그때는 책을 읽을 시간 조차 없었던 것일까, 떠올려 보면서 최근 내가 구매했던 책을을 읽어 없애는 일련의 업보를 청산하고 있다.


그 점이 나에게는 꽤나 의미 있게 다가오는데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이것을 정제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그 과정에서의 의미가 나에게 매우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집어든 책은 정한아의 울프 노트이다. 당시에 여성 작가들이 성행하기도 했고 꽤나 많은 작가들의 책을 구매하면서 이혜미, 이영주 다음으로 내가 꼭 탐독하고 싶었던 작가이기도 하다. 정한아 작가의 특징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예리한 문장과 단어의 선택일 듯 싶다. 어쩌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다소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으나 나는 이 또한 시라는 갈래의 관점을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랑과 연민, 공동체 의식, 나를 숨기고 사는 타인에 대한 관점, 그리고 가장 독특한 것은 울프와 크루소라는 인물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부자가 싫어 골프채를 훔쳤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골프채가 너무 많아 자신은 구부린 채 자야 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의 모습 같은 것이랄까. 그 사람이 크루소인지 울프인지 댓글로 논란을 벌이는 등의 시적 형식 또한 매우 신선하다. 이런 것들이 정한아 시인의 고유성이 아닐까 한다.


당신은 오늘도 구립 도서관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더군. 당신은 오늘 생각했다. 공부가 노동이 되고 문학이 상품이 되어버린 현실을. 야근하듯 읽고 쓰다 자기의 공부와 문학으로부터 소외돼도 파업할 수도 없는 현실을. 파업해도 당신 말곤 아무도 타격받지 않을 현실을. 당신은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잊어버린 권태기의 부부처럼 책임감으로 책을 읽고 의무 방어로 시를 쓰고 있었지. 권태기 이후의 사랑에 관해. 그 피로의 미덕에 관해 당신은 미처 생각지 않은 듯하더군.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재연하려 당신은 다른 책들을 열심히 들추어 보았자. 어쩐 일인지 두근거리지 않았어. 심장의 불수의근이 만족할 만한 해답을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이제 두근거릴 때라곤 죄 지을 때뿐. 그래서 당신은 거짓말을 시작했다. 남들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거짓말을. 뭐 어때, 그래도 재미있잖아,라고 당신은 속으로 중얼거렸지. 재미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몰랐다. 당신은 당신을 감시할 수 없었으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을 증명할 손쉬운 방법으로 옆 사람의 불성실과 위선을 고발하더군. 드라마 주인공으로 사는 일은 지루할 틈이 없는 일. 극적으로 위대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몰랐다. 거듭 자기의 거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일을 저지르는 건 방화범들의 특기. 안타깝게도, 이제 곧 당신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두근거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나. 요절하기에도 전향하기에도 늦은 나이. 당신은 기억할 수도 없는 어느 젊은 날에, 세상으로부터 잊히기 두려워 자기 자신을 영원히 잊어버리기로 서서히 결심해버렸던 것이다. 충분히 고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독 속에서만 가능한,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등한했기 때문에. 그, 작고 여리고 파닥거리는 나비처럼 엷은 것을.

/ 나는 왜 당신을 선택했는가 ― 론 울프 씨의 편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의 가장 큰 틀은 울프와 크루소의 관계성이다. 두 사람이 같은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뒷 부분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데 이 편지 글을 다시 복기하니 다시금 그 관계성에 대해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론 울프 씨의 편지'라는 점에서 매일 같은 일을 행하는 권태적인 삶을 사는 존재에게 존재의 이유 또는 또 다른 삶의 의미나 업무를 시키기 위해 그를 각성시키는 행위로 글을 읽었다. 무의미가 유의미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일련의 나비가 날개를 펼치게 되는 과정과 연결하며 새롭게 태어난 존재는 크루소에서 울프로 변용된다. 이렇게 바뀐 존재의 탄생 목적은 무엇이 될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크루소와 울프의 동일성보다 그들이 왜 그런 행위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목적성이다. 그 이유는, 권태로운 삶 때문이었다는 것 말이다. 권태로운 삶은 항상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고 평범함이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이것을 떨쳐내고 오히려 도전적이며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위험이 도사리는 일이라도 스스로 달려 들어 보는 것, 그것을 삶의 또 다른 목적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비 그친 오늘 저녁엔 개밥바라기가 / 모자를 벗고 까딱 / 목인사를 합디다/ 아아, 참말로 긴 우기雨期였어요, 나는 / 지붕 밑에서 나와 손을 내밀었지요 / 마는, 그는 또 그렁그렁한 눈으로 / 까딱, 목인사만 합디다 / 젖은 나뭇잎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 차갑고 정중한 안부가 / 투닥, 투닥, 흩어졌습니다

나는 온몸이 성대聲帶인 것처럼 / 컹! 컹! / 부러 짖어보았지요 … 보이냐고, 나는 / 멀어서 아름답고 / 멀어서 쓸쓸해진 당신이 / 무언가 참고 있는 것만 같다고

내 방엔 아직 젖은 짚더미처럼 케케묵은 일상이 / 우우우 낭자하고 / 죽어가는 매미는 / 후들거리는 다리로 창문을 두르린다고 / 죽어가는 매미의 마지막 울음소리는 꼭 / 다친 개구리 울음소리 같다고



멀어서 아름답고 / 멀어서 쓸쓸한 그가 / 알아볼 리 없겠습니다만 / 그가 참고 있는 것이 / 웃음인지 울음인지 비명인지 /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만



죽어서 별이 된 사람들과 / 죽어서 사람이 된 별들 사이에서 / 허기가 내내 가시지 않았습니다

/ 개밥바라기별
(아침에 뜨는 금성을 샛별, 개들이 허기지는 저녁 무렵에 뜨는 금성을 개밥바라기라 부른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좋아했던 또는 필사하고 싶었던 시들을 따로 골라 놓았었는데, 개밥바라기별 또한 개중 하나였다. 개밥바라기별이라는 제목에 빗대어 시에는 두 가지 대상이 나타난다. 개밥바라기별이라 하는 금성과 그러한 금성을 기다리는 개, 그래서 개밥을 바라는 별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를 읽으며 별이 가지는 보편적인 희망이나 긍정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는데 그 부분에서 나는 계속 별을 기다리고 마치 스스로가 죽어가는 것처럼 느끼는 부분도 있다. 비록 그(라고 표현할 수 있는 금성)가 나를 알아볼 리 없더라도 나는 계속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고 봐 달라고 외치는 화자의 모습에는 간절함이 있고 진실성이 있다. 그 지점이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김승일 시인이 쓴 짧은 글귀를 떠올렸다. 나는 남들이 읽지 않는 글은 싫다고 내 글을 읽어 달라고 설득하고 설명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아주 작은 소리라도 나를 봐 달라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고 싶다.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고 싶다는 것이다.


시인의 말

언니, 배고파?
…… 아니.
졸려?
…… 아니.
그럼 내가 만화책 빌려 올 테니까, 그때까지 자살하지 말고 있어!     

띠동갑 동생은 잠옷 바람으로 눈길을 걸어
아직 망하지 않은 만화대여점에 가서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빌려 왔다.
우리는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봤다.
눈이 아하하하하 쏟아졌다.

그 후 20년, 이 만화는 아직도 연재가 안 끝났다. 그건 그렇고,

내 동생을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18 봄
정한아


정한아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날카롭고 예리한 시인만의 시점을 가져 본다. 아직까지 나는 대단하고 능수능란한 독자는 아니지만, 이 시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라는 형식이 갖는 수사법을 놓치지 않는다. 한꺼풀을 벗겨 내야만, 또는 그 이상을 들여다 보아야만 보이는 글이지만 이전에 텍스트 자체에서 주는 의미와 내용에 대해 감각한다면, 세상의 부조리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에 충분한 도움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시집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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