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여름 저녁의 거리가 너무 밝아서 몸 숨길 곳이 없으면 어디로 가야 하나 모르는 개가 여길 보고 짖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홀로 걷던 천변의 풍경이 무심코 아름답게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이 내 몸 누일 곳이 없다면 어째야 하나
산책 나온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인사를 해야 하나 산책 중이시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해야 하나 알긴 아는데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세계의 밤이 오고 늘어선 집들에 불이 켜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름밤 물가의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기 시작하는데 반팔 티셔츠 한 장뿐이라면 어떻게 하나
/ 바지 입은 사람은 바지를 입고 떠난다
어떤 사람은 가끔 아는 사람이 지나가도 모르는 척 가만히 서 있을 때가 있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아는 척하기 피곤해서요, 힘들어서요, 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산다고? 인생 피곤하게 산다, 라고 할 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자기파괴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게 저라는 사람인데요, 그냥 그렇게 태어났어요, 왜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고 그냥, 그렇게 되어 있었던 거예요.
어쩌나 침실 구석에 벌집이 발견되면
그런데 벌이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돌아온 집엔 아무도 없고
모처럼 죽지 않고 살기로 결심했는데
다 꿈이면 어쩌나
꿈이 아니라면 정말 어쩌나
주인 없는 벌침은 둥근 구멍이 바글거리고 누군가 씹고 뱉은 것들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나는 침대에 눕는다
잠들었을 때 벌이 나오면
벌이 나오지 않으면
/ 벽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보편적이며 객관적이 사실이지만 분명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각적인 측면 외에 다양한 것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벽해]에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 보이는데 어쩌면 자신의 믿음이 두려움을 이끌어내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동물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자신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개는 또 사람을 쫓고 또 잠시 가깝고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다
예전에 누가 물었다는데
홀로 남은 개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묻는다
거기서 혼자 뭐 하시냐고
그냥 숨 쉬고 있어요.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네
/ 구자불성
해가 길어지는 여름 저녁에는 그림자도 같아지기 마련이다. 이제는 그런 그림자에 놀라지 않고 흘러가는 저녁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여유를 가져 보기도 한다. 그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고독감도 없고, 무너질 것 같은 애처로움도 사라진다. 나는 지는 해와 어둠 그리고 나의 그림자를 맞물려 본다. 나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가로등 아래에 손을 뻗었다. 기이하게 빼어난 경치로구나, 손장난이 이어진다. 나는 개였다가, 새였다가, 열 손가락 인간이었다가. 외로움이라는 것의 이면에는 결국 나와 늘 함께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음을 깨닫는다.
어느 저녁 정약용이 친구 이서를 불러 어두운 실내에 다른 물건들을 물리고 촛불과 국화만을 두니 놀라운 문양이 벽면에 나타나 그 기이한 모습을 밤새 즐겼다고 한다
그렇군요 그런 사랑도 있는 법이군요
찻잎이 혼자 선다거나
멀쩡한 그릇이 혼자 깨지기도 하지만
해가 길어진 여름 저녁 거실 벽에 생긴 그림자를 보고도 이제는 놀라지 않습니다
식탁 위에는 내가 먹지 않은 음식들
깨지지 않은 그릇을 부시며 생각합니다
깨지지 않은 그릇을 부시며 통곡합니다
당신의 어둠이 당신의 존재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군요
“기이하다. 이야말로 천하의 빼어난 경치로구나”
정약용과 이서는 밤새 술을 마시고, 또 시를 읊었습니다만 이제 아무도 시를 읊지는 않겠지요
혼자 흔들리는 그림자가 있고
그걸 보며 밤새 우는 사람이 있고
그걸 사랑이라 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
/ 없는 저녁
조난이 길을 잃었다 하여 슬픈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영영 끝나지 않는 길을 걷는 게 조난의 기쁨이리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만나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게 된다.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존재의 환각에 몰두하면 각자의 귀를 서로 맞댄 채 속삭인다. 여기 사람이 죽어 있어요.
품속에 있는 것은 오늘의 일당 나의 전 재산 그렇게 마음먹고 거리로 나선다
삼성타워 아래
저녁
그는 아직 오는 중이라고 했다
통행 차량 많음
초미세먼지 나쁨
지나가며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람이 있고
불만은 없음
사랑도 없음
흘러가는 저녁에 마음을 기대고 그저 눈감고 싶은 고독도 없고 무너질 듯 애처로운 자세로 스스로도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바라는 비극도 없다
마음이 깨질 것 같은 사람이 길을 물어서
아뇨 저는 몰라요 그렇게 답했다
/ 느린 사랑
푸르다는 말은 기꺼이 바다보다 산에 더 가까워진다. 가끔은 인간으로 태어난 어설픔을 감내하고 살고 있다 느낀다. 이제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점점 말을 아끼기도 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은 습관이고 태도가 된다. 황인찬의 시가 그렇다, 다정하고 사랑하는데 사실은 엄청난 외로움이 있다. 그 외로움은 고질적인 것이라 영영 고쳐지지도 나아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의 삶과 함께 할 것이다.
함구증은 어린이에게 나타나는 병이래. 사실 누군가 입술을 숨긴 이유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림자따위에도 마음이 깨질 것 같은 사람이 길을 묻는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아니요 저는 몰라요, 아니요 저는 몰라요, 아니요 저는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