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선,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브런치를 처음 작성하기 전 만약에 정식적으로 글을 쓴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그래도 나름 책을 많이 읽으니까, 책을 읽고 느꼈던 감상을 짧게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게 블로그에 있던 글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가 백은선의 내가 좋고, 싫고, 이상하고였다.
백은선 작가 또는 시인을 생각하면 왜인지 묘한 동질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괴랄하고 예민하고 눈물도 많고 화를 잘 내고 하지만 그만큼 사람을 사랑하고 금방 마음이 동하고 결국 모든 것을 사랑으로 귀결시키고 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좋아함과 동시에 우리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가 서로 다른 점은 단연 그녀의 솔직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장 좋아하는 대목 중 하나인 [보세요, 나의 우울을]이라는 문장은 요즈음 흔히 말하는 우울 전시와 같은 가볍고 위트 있는 농담이 아니다. 그녀가 우울이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 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 용기가 부족하고,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으며 오히려 용기를 얻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쁨을 몰라서
사랑을 했다
정언명령처럼 들어온 것
이 도시는 너무 어두워서 너무 밝고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죽어서라도 옆에 있고 싶다
너는 내게서 무얼 보았을까
빗금을 밟으며
휘파람을 부는 소녀
움푹 들어간 보조개
비뚤어진 앞니
뾰족한 입술
너는 아니
우리 기쁨의 임계점이
무지개 끝에서 색을 잃을 때
무엇이 부서질지
하나뿐인 전부를 잃을까 봐
사랑을 할 수 없었다
기쁨 같은 거
몰라도 괜찮다
/ 형상기억합금 – 지옥에서 만나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기쁨을 이야기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 또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다 더 생산적이라고 느낀다. (누군가 아니라 하더라도 보편적으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어떤 것이 긍정적인 것, 더 좋은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의 반대. 그러니까 부정적이고, 더 나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린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얻기 위해 그만큼 희생하거나 손해 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지옥에서 만나자는 시인의 말은 어떤 소녀의 버티는 삶, 아름답게만 느껴져야 할 사랑이지만 죽어서도 함께 있고 싶은 것도 사랑이라는 그로테스크함과 맞물린다. 그리고 결국 지옥에서 만나자는 우리의 약속은, 이 이야기의 최종장이 부정적이지만 만나서 함께 할 수 있다는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괴물은 말야 밝은 걸 싫어하고 검은 피를 흘려
다음
괴물은 말야 시끄럽게 기침을 하고 사람을 먹어
다음
괴물은 말야
……
괴물은 말야
……
긴 침묵이 지나고
하나둘씩 눈을 떴을 때
그애는 울고 있었다
너 왜 울어?
모두가 그애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흙을 파내려가는 뾰족한 손톱을 생각해 상처 입은 무릎을, 배고파 잠이 오지 않는 매일 밤의 뒤척임을, 빛이 머리를 관통할 때의 저린 통증을 생각해
시간은 약이 아니다 생각에는 마침표가 없기 때문에 빛과 소리는 끝이 없고 단지 이동할 뿐이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계속되었다
밤은 길고 밤은 영원해서
그치지 않았다
동그랗게 모여 앉은 우리가 기울어질 때
영문도 모르는 채
술렁이며 눈물이 번질 때
누구도 다음, 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 진짜 괴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백은선 시인은 자신의 말처럼 좋지만, 싫고 이상한 점도 분명히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도 사랑해 버리자는 메시지를 건네는 듯하다. [괴물은 말야]로 시작되는 이 시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괴물의 이면을 살피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서사가 전복된다. 괴물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이 일고, 또 내가 괴물이 아니었는지, 또는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에게도 괴물의 면모가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떠올려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자 마음먹는다면, 이제는 괴물에 대해서 누구도 정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영문도 모르는 채/술렁이며 눈물이 번지는 때]를 공유할 수 있다.
갑자기 물었잖아
모든 것을 기록하는 카메라를 머릿속에 심을 수 있다면 이식할 거야?
나는 아―니, 라고 대답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너는 몰랐으면 좋겠어서
괜히 케첩을 푹 찍어 감자튀김을 네 입에 밀어넣었다
빛나는 것은
전부 두 손 안에 있는데
어째서 자꾸만 숨기고 싶어지는 걸까
/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말
끊임없는 자기부정에 시달리는 사람은, 어쩌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은, 비록 상자를 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품에 상자를 안고 사는 사람이다.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그것을 열어 감당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백은선의 시집을 통해 상자에 담긴 사랑과 진심을 기대하고 그렇게 매일을 사는 사람들 나름의 고충을 위로해 보고 싶어지는 마음을 느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