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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림 Jun 04. 2024

프로 찍먹러 포기 선언

(광고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스스로와 정한 약속이 있다. 

약속은 일주일에 하나씩만 잡기.

원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터라 이렇게 정하지 않으면 캘린더를 빼곡히 채운 약속으로 통장을 지킬 수가 없다. 지난주엔 이미 평일에 약속을 두 번이나 잡았기에 주말은 강제로 쉬어야 했다. 



그러나 MBTI E 인간으로서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어디 갈 데가 없나 곰곰이 생각하다 마침 사야 하는 물건이 떠올랐다. 다이소 가기 전 올리브 영 방문. 최적의 외출 경로를 머릿속으로 입력한 후 밖을 나섰다. 



띠링

경로를 이탈할 것 같습니다.



아니 날씨가 왜 이리 좋은 거야? 목적지를 향하는 길 내내 완벽한 날씨에 어디라도 가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쩌지? 1분 간의 고민 끝에 나는 잠실행 버스에 올라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결정이지만 사실 결정하기까지 많은 전제 조건이 있었다.


1. 오늘따라 책이 읽고 싶었는데, 잠실에는 교보 문고가 있다.

2. 잠실은 지난주 약속 모임 장소였는데 시간이 없어 눈에 아른 거리던 양말을 사지 못했다.

3. 마침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 심리적 거리가 가깝다.

이러한 전제 조건과 완벽한 날씨가 시너지를 내어 갑작스러워 보이는 잠실행이 결정된 것이다.






예정된 할 일(양말 구입)을 끝마치고 교보 문고에 갔다. 지난번에 읽다만 <도둑맞은 집중력>을 마저 읽을 예정이었지만 가판대에 즐비한 책들로 정신이 산만해진다. 그때 짧은 순간 나를 사로잡은 책을 발견했다. <진짜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법>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나를 현혹시키기 완벽한 제목이었다. 홀린 듯이 책을 집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기라는 낭만과 달리 책은 상당히 어른(?)스러웠다. 이 말을 설명하기에 앞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굉장히 이상적인 사람으로 현실보다는 환상 속에 살아가는 편이다. 따라서 나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건 낭만적이고, 닿고 싶은 이데아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할 때 분명한 희생이 필요하지만 나는 그것을 잘 생각하지 못한다. 이를 일부러 외면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요소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책은 내가 보지 못했던 그 부분을 직시하게 하였다. 


"행동은 당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목표를 위해 최적화된 상황을 만들고 다른 것은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거의 모든 것을 거절하라. 거의 아무것도 하지 마라. 단, 뭔가를 하게 된다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제대로 해라."
"다른 일은 나중에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라"



새롭게 깨닫는 현실을 메모장에 한 구절 한 구절 옮겨 적었다.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이 역시 내 착각이었다. 그동안 스토리텔러란 단어로 뭉뚱그렸지만 사실은 여러 실타래로 뒤얽힌 덩어리만 있었다.






나는 왜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은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건가, 아니면 외부적 자극 속에 혼재하는 의미를 걷어내기만 하면 만족하는 사람인가?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면 그 동기는 무엇인가? 만드는 행위가 좋은 건가, 전달하는 과정에서 나를 드러내기 원하는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보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단어를 듣고 마음이 계속해서 동요했던 이유. 의미를 다룬다는 말에 에디터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MCN 회사로 취업을 생각했다. 매일이 예측 불가하다는 말에 영상 기자가 되어 볼까 생각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재미와 의미를 주고 싶다며 예능 PD를 결심했다. 그래도 음악 분야에서는 한 번 일해봐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며 A&R 공고를 뒤적였다. 그러다가 결국 나를 직접 보여주고 싶다며 이 모든 것을 부정했다. 어쩌면 계속해서 아무 생각 없이 온갖 것을 엮어놨기에 내가 진정 바라는 것에 대한 뚜렷한 상이 보이지 않던 것이다. 


잘못된 것을 다시 풀어내는 과정은 귀찮다. 그러나 귀찮음에 그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평생 의미 없는 것을 엮다가 삶이 끝날 수 있다. 이 상황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지금 하고 있던 것을 모두 놔 버리고 전부 새로 시작하겠다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무지성으로 하고 있던 것들의 동기를 들여다 보고 그것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돌아봐야겠다. 그동안 프로 찍먹러로 살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진지하게 하나씩 음미해보려 한다. 거창한 의미를 내려놓고 현실에 가까운 본질을 깊이 파헤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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