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리 May 27. 2024

숨소리도 듣기 싫은 그대여

불쌍하고 멍청한 인간

아이와 주말을 보내고 있으면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이 충만해진다.


나를 보고 코를 찡긋하며 미소 짓는 그 얼굴이,

하하하 크게 웃는 그 목소리가,

오물오물 움직이는 볼과 입술 어찌나 이쁜지 모른다

육아의 행복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낀다.


사실 엄마아빠 집으로 들어와 살기 전에는

육아의 행복을 자주 느끼진 못했다.

아이는 너무 사랑스럽고 예뻤지만, 늘 버거웠다.

항상 물 밖으로 겨우 콧구멍 두 개만 내놓고 간신히 숨 쉬는 기분이었다.

전남편은 늘 일한다고 바빴으니까,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며, 집에 와서도 노트북을 놓지 못했으니까, 우리에게 육아는 '함께' 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는 일이었고, 그는 날 종종 '도와'주었지만, 그의 도움은 늘 불만족스러웠다.

아이가 태어나고 함께 사는 약 1년 동안, 그도, 나도 육아를 하면서 느끼는 행복은 거의 못 느꼈던 것 같다.




밥 먹는 게 처먹는 걸로 보이면 그 관계는 끝이 난 것이라던데

어느 날인가부터 전남편이 밥 먹는 것뿐만 아니라 숨소리도 듣기 싫은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서 돌아온 뒤 진정한 신생아 육아가 시작됐다.

아이는 두 시간마다 한 번씩 깨서 분유를 먹어야 했고,

당연하게도 잠자는 건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회사에 적응해야 한다고 조리원에서도 거의 날 홀로 뒀던 남편은 집에서도 날 홀로 뒀다.

신혼여행에서도, 내가 제왕절개를 하러 입원했을 때에도,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일을 해야 한다고 노트북을 잡고 있던 그는 출산휴가를 쓰고도 일을 해야 한다며 노트북을 앞을 떠나지 못했다.


산후도우미님이 와주시는 아침부터 낮 동안은 출근을 하지 않는 날에도 재택을 한다며  작은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밤에는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까 밤 육아는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그는 원래 잠귀가 엄청나게 밝고 예민했다.

자다 말고 내가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조용히 일어나면 옆에서 화들짝 놀라며 깨서 "어디가?!" 묻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아이가 태어나니 달라졌다.


나는 아기가 조금만 낑낑 거리는 소리를 내도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는데, 그는 아기가 비명을 지르며 울어도 드르렁 코를 골았다.

내가 너무너무 피곤한 날에 아기가 우는데도 도저히 눈을 못 뜨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날 흔들어 깨웠다.


결국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그를 위해 아기를 안고 거실에 나와서 달래다가 아기와 같이 거실 소파에서 잠드는 날들이 계속됐다.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친구네는 남편이랑 같이 수면교육 공부도 하고, 육아용품 당근도 하고, 밤 수유도 교대로 하고, 주말에는 자유부인도 하고...

힘들지만 함께 이겨내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아이를 낳으면 남편과 함께 으쌰으쌰 서로 응원하며, 힘들어도 전우애를 느끼며 서로 의리를 지키고 의지를 다지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육아는 철저히 나만의 것이었다.

외로움이 사무쳤다.

아이를 보면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오르다가도

혼자 버텨내야 하는 내 삶이 버겁게 느껴졌다.


그에게 불만을 말하면,

처음엔 나도 잘할게 미안해하던 그는

점점

왜 자기를 맨날 죄인으로 만드냐고 화를 냈다.

자기는 우리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중이라고

자기가 연봉을 많이 받는 건 이런 일 하는 시간도 다 포함된 거라고

내가 너보다, 너의 친구들보다, 너의 친구들의 남편들보다 훨씬 돈을 잘 버는 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더 화가 난다. 일을 해서 돈을 벌었던 게 아니면서. 범죄자 주제에. 횡령하고 있던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했을까.)


그러면 또 난 울컥했다

우리가 이렇게 빚더미에 앉은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지가 사고 친 거 지가 수습 겨우 하면서 쟨 왜 저렇게 당당한가.


아이가 생기면 가족으로서 더 유대감이 생길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정 반대였다.

남편과 점점 멀어지는 현실이 힘들고 슬펐다.


어느 날 밤 역시나 아기는 울었고, 그는 여전히 코를 골았다.

우는 아기를 안고 거실로 나와 달래는데 그의 잠자는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당장에라도 방에 들어가서 그의 얼굴을 쿠션으로 눌러버리고 싶었다.

그 밤, 아이를 안은채 소파에 앉아, 그의 코와 입을 막아버리지 않기 위해 내 모든 인내를 끌어다 썼다.


정말이지, 숨소리도 듣기 싫었다.



별거를 시작하고, 부모님과 함께 육아를 하면서 언제부턴가 아이와 둘이 있는 시간이 진심으로 행복하다.

늘 나와 함께하던 숨 막히는 버거움이 사라졌다.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이 처음으로 100%의 행복으로 차올랐던 그 느낌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렇게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 눈물이 나왔다.


그가 너무 불쌍했다.

걔는 이 행복을 모르겠구나.

이 충만함을 놓쳤구나. 진짜 바보다.

우리 세 가족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멍청한 거짓말만 아니었어도,

여유롭진 않아도 부족하진 않은 그런 안온한 삶을 함께할 수 있었다.

진짜 불쌍하고 멍청한 인간이다.


멍청한 게 다 죄는 아니지만,

어떤 멍청함은 죄가 된다.


그는 멍청한 죄인이고, 그 죗값을 치르고 있다.

이전 11화 운명애, AMOR FATI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