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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리 May 29. 2024

네? 우울증이요? 제가요?

우울증이라 다행이야


"선생님, 전 우울하지 않은데요? 저 우울증 아니에요."

"환자분 같은 경우가 치료가 더 어려워요.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처음 정신과에서 진료를 봤을 때 있었던 일이다.




내가 남편복은 없어도 친구복은 있는 편이라 좋은 친구들이 많다. (사랑한다 칭구들아)


그중에서도 거의 매일 연락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두 친구가 있다.

이 친구들에게는 이혼 전(복직 전) 독박육아를 한참 할 때 매일 영상통화를 하며 나의 고통을 토로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육아를 하며 일상을 나누고 있었다.


"나 요즘 진짜 정신없나 봐. 너무 배고파서 생각해 보니까 오늘 내가 밥을 안 먹었더라? 아기 이유식만 챙겨주다가 나 밥 먹는 걸 까먹은 거 있지. 어떻게 밥 먹는 걸 까먹냐 진짜. 나 건망증 너무 심해졌어~ 애 낳고 뇌를 같이 낳았나 봐~"


나와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고 있는 친구가 사뭇 심각해진 목소리로 자기는 그 정도로 심하지 않다고 이상하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또 다른 친구도 꼭 병원을 가보라고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난 좀 힘들어서 그렇지 우울하진 않은데?'라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이 혹시나 우울증이 아니라 스트레스성 가성치매 같은 거면 어떡하냐고, 너 아기 키워야 되는데 아프면 안 된다고, 치료 빨리 받는 게 좋겠다고 하자 겁이 덜컥 났다.


그즈음 내 건망증은 솔직히 좀 심각한 수준이었다.

거의 일상의 전반에 걸쳐서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녁에 너무 배가 고파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날 식사하는 것을 까먹었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자주 있었다.

아이를 세수시키려고 안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손만 씻기고 나오는 일은 예사였고,

무언인가를 하려고 생각했다가도 뒤를 돌면 까먹고 다른 일을 하는 일은 너무 자주 있어서 집안 청소나 정리정돈 등 집안일을 할 때 특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설거지를 하려고 수세미를 찾다가 갑자기 빨래를 돌리려고 세제를 찾고, 아기 옷을 정리하려다 말고 아기 장난감을 찾아다니고.. 이런 일은 너무 많아서 다 나열할 수도 없다.


나는 아기를 키워야 하는데, 내가 벌써 치매가 오면 안 되니까, 조기치료가 중요하니까,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치료는 최소한 1년 이상 걸린다고 했다.

나의 우울증은 아주 깊고,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었단다.

그냥 건망증이 좀 심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우울증의 증상이었다니.


그리고 한편으로는 좀 안심이었다. 치매가 아니어서.

치매를 앓고 있는 우리 할머니를 보면서 나도 혹시 치매가 시작된 것일까 봐, 나도 우리 할머니처럼 되어버릴까 봐 너무 무서웠는데, 치매가 아니라 우울증이라니! 너무 다행이었다.



약을 먹기 시작했다.

주요 작용 기전은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란다.

도대체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그냥 똑같은 것 같은데...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너무 기분이 안 좋고 뭔가 하루가 잘 안 풀리고 느낌이 이상한 날,

내가 약을 안 먹었다는 게 생각났다.

역시 호르몬의 힘은 위대하다. 현대 의학 만만세구나.

약의 효능을 느끼게 된 뒤로 약을 더 열심히 챙겨 먹고 있다.


이 약 없이 남편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우울증에 걸려서, 약을 먹고 있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혼하기 전의 힘들었던 결혼생활의 기억이 희미하다.

이것 또한 힘겨웠던 기억을 지워준 우울증 덕분이다.

가끔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몰아쳐 오는 날, 생각한다. 이건 다 우울증 때문이라고.

내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나의 잘못이 아니고 이건 내가 그냥 아프기 때문에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라고.

나의 우울증은 그 무엇보다 훌륭한 핑계가 되어준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울증이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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