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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리 May 31. 2024

우연히 너를 보고

우리 마주치지 말자

원래 정신과를 가려던 날에 일이 생겨서 할 수 없이 지난 주말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마주쳤다.

전남편도 그 병원을 다닌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 만날 줄이야.

그도 많이 놀란 눈치였다.


난 그를 모른척했고

그는 나를 아는 척하고 싶어 했다.


내 바로 앞 순서였던 그의 진료가 끝나고, 내가 진료실에 들어가자 우리 부부의, 아니 나의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신 의사 선생님이 약간 안타까워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신다.


원래 이번에 병원을 가면 선생님께 상담하고 싶은 일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머릿속이 완전히 표백되어 버렸다.


원래 선생님께 하려고 했던 말들을 모두 뒤로 한채 말했다.


"선생님, 저 아무래도 병원을 옮겨야겠어요."


선생님은 모두 이해하신다면서, 지금 나의 상태엔 그를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면서.


병원에서 마지막 진료를 보고, 병원을 옮길 때 필요한 서류들을 발급받고 밖으로 나왔다.

제법 아쉬웠다.

상냥한 선생님의 진료와 제법 잘 맞아서 기왕이면 병원을 옮기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병원 밖에 나오자 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순간 울컥한 기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냉정하게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조심히가..."


그를 외면하는 내 뒷모습에 그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 핸드폰에 알람이 하나 울린다.

내가 너의 인사를 못 들었을지 걱정이 되었던 걸까?


메신저도, 전화도, 나와의 모든 직접적인 소통창구를 차단당한 그가 선택한 방법은 계좌이체였다.


지난 10년간 세상에서 나랑 제일 가까웠던 사람은 이제 인사를 하려면 나한테 5만 원을 줘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입금내역을 보는데 눈물이 나온다.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내가 나눴던 사랑이 겨우 이런 결말 밖에 되지 않다는 사실이, 나의 지난 10년의 세월이, 허무했다.


너 진짜 이거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니???

가서 따져 묻고 싶었다.

화가 났다.

그를 향한 원망이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나에게 쏟아진다.


아무렇지도 않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증상이 있었다.

그러다 한동안 괜찮길래 그 증상은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를 마주친 주말 이후 다시 시작되었다.

빨리 다른 병원을 찾아봐야겠다.


그에게 답장을 하고 싶어 진다.

이제 우리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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