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 한켠에는 타인을 향한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다. 나 역시 그렇다. 나와 조금 다른 누군가를 마주치는 순간 '어라?' 싶은 느낌을 받는 건 인간인 이상 당연한 거니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나 문신을 한 사람들을 보면 불편한 감정이 든다. 정돈되고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그들의 존재가 그런 분위기를 해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 불량한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들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누구보다 문신에 대해 거부감이 크던 나의 생각을 바꿔준 경험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22살 훈련소 때의 기억이다.
입대하기 전까지 속으로 걱정을 참 많이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달을 같이 살아야 한다니,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한 방에 10명씩 들어가는데, 난 참 운도 없다. 팔이 문신으로 뒤덮여있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 것 아닌가. 통칭 이레즈미라고 부르는 정도의 문신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문신이 있다는 것 자체를 거부했던 나는, 쉽지 않은 한 달이 되겠구나...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한다.
지내다보며 든 생각, '왜 착하지?'
분명히 문신을 한 사람들은 불량하고 거친 사람들일 텐데.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일도 많다.
'왜지? 분명 나쁜 사람들일 텐데.'
의구심만 가득해진 채로 시간은 흘러간다.
훈련소에 갇힌 지 2주.
'전우애'라는 뽕에 차올라서일까. 서로를 더욱 챙겨주기 시작한다. 욕을 한다거나 싸우는 일은 일절 없고, 어떻게 하면 더 즐겁고 편안하게 한 달을 끝마칠까 하는 생각밖에 없다.
문신 친구들에 대한 편견은 거의 사라진 상태. 성실하게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나랑 다를 게 하나도 없더라.
훈련소 3주 차.
평소에 운동을 안한 탓일까. 발이 부어서 깁스를 하게 된다. 목발을 짚고 나타난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깁스를 풀 때까지 언제나 나를 챙겨줬던 건 이 두 명. 문신을 한 친구들이었다.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는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같이 열외를 한다거나, 내가 맡은 청소구역을 대신 청소해 준다거나. 내가 가장 안 좋게 보고 있던 그 둘이 나에게 가장 잘해주고 있더라.
그동안 나는 왜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려 했던 걸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첫인상만으로 왜 부정적이게 바라봤던 걸까. 색안경을 낀 채로 살고 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 순간이었다.
이후로는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신 하나, 담배 한 개비로 그들의 전부를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 잡았다.
이들과 함께한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겠다만, 6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남아있다. 이 중 한 친구는 서울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기에, 최근에 식사를 하고 오기도 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있더라.
편견이란 제한된 정보로 상대방을 재단하는 행위다. 외모, 학벌, 옷차림, 말투 등 수많은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갑자기 드는 생각.
과연 나에게 타인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설령 그가 사회적 기준에서 '못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를 함부로 대할 권리가 있는가?
또 하나의 생각.
나는 정말 아무런 편견도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저 편견 없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뿐일까.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편견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 어느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완벽한 무편견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끊임없이 자문자답하며 나는 오늘도 편견과 싸운다.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희망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나의 모순된, 하지만 진실된 모습이다.
작가의 주저리 주저리.
편견을 가지지 않는게 꼭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괜히 쉽게 사람을 믿었다가 실망을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아 역시 그런 사람이었네.'
경험적으로 100에 99는 그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근데 예외인 1명을 보고 편견을 없앤다는거 자체가 너무 희망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그 이미지를 가지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텐데. 직접 경험해본 우리가 제일 잘 알테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아하는 걸까.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기를 바라는 걸까.
나의 바램이 주관이 되어버린 안좋은 현상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