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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을 이어붙이다.

by 한찬희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점점 잊혀지는 인연들이 있다. 학창 시절 친하게 지낸 친구들, 20살이 되어 처음으로 알바할때 나를 많이 챙겨주던 사장님, 부족했던 나를 이끌어주려 최선을 다한 회사 선배 등.

그 시절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인연들이다. 분명 그 당시에는 많이 친했고 살아가면서 계속 볼 얼굴들이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좋은 인연은 쉽게 사라져만 가는지.

가끔 상상 속에서 그들을 떠올려보곤 한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멋진 어른이 되었겠지?'

슬프게도 그들의 소식을 접할 방법은 없다. 언제나 상상으로만 그쳤던 이유이기도 한데, 전화번호가 남아있지도 않고, 인스타와 같은 sns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니까.

30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 느끼는 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구나.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살아갈 수 있었구나. 내가 잘난 게 아니었구나. 그들이 만들어준 거였구나.

우리는 어찌하여 그들을 잊고 살고 있는 걸까.
왜 우리는 좋은 기억들을 가슴에 묻고만 사는 걸까.

마음속 깊이 그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제는 상상으로만 떠올리는 걸 멈추고, 직접 마주해보기로 한다.

물론 그들과 다시 만남으로써 엄청난 친분을 유지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주 보는 사이가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대로 흘러갈 인연을 잠깐 붙잡는 것. 앞으로의 만남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연이 끊겼던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
이것을 인연을 이어붙인다고 표현하겠다.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몇 가지 있는데,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 남아있어야 한다. 특별한 기억이면 더 좋겠지만 인생에서 특별하다고 할만한 일은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으니, 좋은 기억 정도로 말해보겠다.

오랜 시간 등하교를 같이했던 기억, 힘든 시기를 같이 이겨냈던 기억, 과 같이 친함의 정도가 커서 기억에 남는 인연들도 있겠고,

밥 한 끼를 같이 했는데 그때의 대화가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든지, 우연히 같이 한번 놀았는데 잊혀지지않을만큼 즐거웠다든지, 와 같은 친분이 크지 않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인연들도 해당된다.

상대방이 불편해하지 않아야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인연을 이어붙일 수 있겠으나, 상대방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나 혼자만 특별하다고 생각했거나, 개인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 만날 수 없기도 한다. 서운해하지 말고 그 인연은 그대로 흘려보내도록 하자.


인연을 이어붙일 수 있는 상황은 크게 3가지.

우선, 내가 찾아가는 경우.

시작은 단순했다. 7년 만에 본가에 돌아오니 졸업앨범이 눈에 띄더라. 초, 중, 고 3개의 앨범 중 망설임 없이 가장 먼저 꺼내든 건 중학교 졸업앨범. 가장 순수했던 시기이기도 했고, 언제나 즐거웠던 때가 아닐까 싶은 시절이기에 가장 그리워했다. 이런 친구도 있었지... 아 맞다 얘랑도 엄청 친했는데... 다들 잘 살고 있으려나? 기억에 남는 건 3명. 나를 포함한 4명이서 정말 즐겁게 2학년을 보냈던 기억이 밀려왔다. 당연히 얼굴을 본 지도 연락을 안 한 지도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왠지 모르게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차올랐다.

2명의 전화번호는 졸업앨범에서 찾았고, 1명의 전화번호는 옛 휴대폰을 뒤져 찾아냈다. 운이 좋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다들 번호가 그대로였다. 한 명씩 연락을 해보니 그들도 나와 같은 그리움이 남아있었기에 날짜를 정하고 다 같이 만나기로 한다.

13년 만에 옛 친구들과 술 한잔한 소감은, 얘네랑 술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다들 그대로여서 신기했고,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서 신기했다.

이것이 인연 이어붙이기의 첫걸음이었다. 솔직히 못 만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는데 가능함에 너무 놀랐다. 특히 더 좋았던 건,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 그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았고,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 신기함 투성이였던 만남.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후로도 6년 만에 연락하는 훈련소 동기, 종종 연락은 하고 있었지만 만나지는 않던 탁구부 시절 친구, 어릴 적부터 좋은 기억은 많지만 막상 둘이 만난 적은 없는 사촌 동생까지. 내가 먼저 연락하여 자리를 만들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았더라면 절대 볼일 없을 것 같은 인연들. 내가 직접 이어붙였다.


반대로 상대방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며칠 전, 언제 와 같이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이 보이는 것 아닌가. 배가 고픈 걸 어찌 알았는지 양손에 햄버거 세트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몇 달 전까지 주말 오후에 일하던 근무자분으로, 내 글을 좋아해 주셨던 분이다. 근무교대를 할 때면 전날에 써둔 글이 어떤지 보여드리곤 했는데, 언제나 집중해서 봐주시고 너무 잘 쓴다고 칭찬을 많이 해준 아주 감사한 분이다. 나와 10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편안하게 서로를 대했고, 그만두는 날에는 언제 한번 보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평일에 일을 하시는 것도 알고 있고, 곧 있을 결혼 준비를 하느라 바쁜 걸 알았기에 찾아올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런저런 게 없더라도 보통은 찾아오지 않는 게 일반적이니까. "다음에 보자~" 하고 인연이 끊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이분은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셨다. 예비 와이프 분과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오셨는지, 술에 한껏 취하셔서 나에게 하는 말.

"투잡을 뛰면서 말을 걸어준 게 찬희님이 처음이었어요. "글 써봤는데 한번 봐주세요."라고 할 때마다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요. 찬희님 글을 보면 진심이 담겨있고, 본인만의 무언가가 담겨있다는 게 항상 느껴져서 글 보고 많이 위로가 됐어요. 나보다 10살이 어리지만 앞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술 한잔해요."

참 신기하지. 감사할 건 오히려 나인데. 글을 쓴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의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것들이 하나둘씩 모여 계속 글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글을 쓰며 살아갈 용기를 얻었으니. 나의 글에 나만의 무언가가 담겨있다는 분에 넘치는 칭찬까지 받았으니.

잠시 멀어졌던 인연이 나에게 찾아와 다시 이어붙여졌다.


마지막으로는, 우연.

불과 엊그제 있었던 일. 예비군에서 아는 후배를 만났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건 아마 10년도 더 되었을 건데,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나를 알아봤고 말이다. 그는 성당 후배로, 함께한 시간은 1~2년 정도로 기억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다른 후배들보다 나를 잘 따랐고, 나 또한 그를 잘 챙겼다. 겉으로는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그이지만 본성은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악의가 없음을 느꼈기 때문. 내가 성당을 그만둠에 따라 자연스럽게 끊어졌던 인연인데, 다시 보니 너무 반갑더라. 어색하지 않은 한마디를 건넨다. "오랜만이네. 살아있구만." 그 또한 반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한다. "잘 지내셨어요?" 4살의 나이차가 있어서일까, 어릴 적엔 하지 않던 존댓말로 말을 건넨다.

"나를 기억하네?"
"형은 당연히 기억하죠..."

나야 후배들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모두를 기억하지만,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컸었는데... 그게 아님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애정이 갔던 후배가 잘 살고 있는 걸 보니 예비군 내내 기분이 좋았고, 언제 한번 다른 후배들이랑 만나기로 하고 번호를 교환한다.

예비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22살에 입대를 했기에 친구들은 이미 예비군이 끝났으니까. 친구를 만나지 못했지만 너무 큰 수확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소중한 인연을 다시 되찾다니.

우연이 우리의 인연을 이어붙였다.


뭔가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인연 이어붙이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것은 아니다. 퇴사를 하고 1년 동안 열심히 살다 보니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제 와 되돌아보니 '아 나는 인연을 이어붙이고 있는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을 뿐.

20대 후반. 인간관계에 싫증이 나고 친구들과 멀어지는 시기. 돈을 많이 버는 친구가 부러워서, 친구에 비하면 나는 너무 작은 존재인 것 같아서, 괜한 자격지심에 친구들을 떠나보내게 되는 시기. 별것도 아닌 기준으로 상대방의 급을 정하고, 관계를 끊기도 한다. 누구나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나도 많이 실감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게 싫다. 그가 지금 당장 일을 안 하고 있으면 어떠한가. 나보다 돈을 많이 벌면 어떠한가. 열심히 잘 살고 있다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렇기에 나는 인연을 이어붙이려 한다.

이어붙여진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될 수도 있고, 또다시 흘러가는 인연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왜 그들과의 만남이 기대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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