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만화를 한 편 봤습니다.
'5억년 버튼' 이라는 만화인데요,
사실 처음 보는 건 아닙니다.
중고등학생 즈음... 한 10년도 더 된 것 같네요.
짧은 만화이지만 큰 여운을 남겼기에,
머릿속에 항상 남아있었죠.
우선 만화를 한번 보고 오시길 바랍니다.
그림체가 살짝 기괴할 수 있습니다.
https://ppt21.com/humor/161681
작중 설명되어 있는 설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버튼을 누르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워프.
2. 그곳에서 5억년간 살아야 한다.
3. 5억년이 끝나는 순간 기억이 지워지며 현실로 복귀. (복귀 시점은 버튼을 누른 직후)
4. 100만엔 획득.
타인이 보기에는 그냥 버튼 한번 누르고 100만엔을 받는 것으로 보이죠.
지금까지도 인터넷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누를 거냐 안 누를 거냐?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몇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누르는 순간 워프가 되면 현실의 나는 어떤 상태에 놓여져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신만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현실의 나는 남아있으니 워프된 나는 내가 아니지 않나?
등등...
복제, 클론, 또 다른 나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옆에서 봤을 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거든요.
친구가 버튼을 눌렀을 때 어디론가 워프가 되는 것을 목격하지도 못하고, 친구의 반응을 봐도 5억년간 엄청난 경험을 하고 온 느낌도 받지 못합니다.
- 작중 표현
"에... 그냥 버튼 눌렀을 뿐인데... "
"우와! 해냈다! 백만엔!! 겟!!"
그렇게 탄생한 논쟁거리가 바로
'5억년을 체험하는 나'를 과연 '나'라고 볼 수 있는가?
겉으로 보기에 변화가 없으니, 복제된 내가 5억년을 체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만 왜 그렇게 결론을 짓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복사가 아닌 워프라고 써있는데도 말이죠.
워프를 한다는 건 나 자신이 직접 이동한다는 말입니다. 복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만 이동하는 것도 아니죠. 나라는 사람 자체가 이동하는 개념이죠.
5억년을 체험하는 나 vs 현실의 나
이런 논쟁을 벌일 필요 없이, 나는 언제나 하나인 거죠. 내가 워프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겁니다.
아니 그럼 워프된 걸 옆에서 왜 못 느끼나요?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잠깐의 순간 동안 워프가 되고, 5억년을 보내고 왔기 때문이죠.
- 작중 표현
"5억년 경험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거에여~"
애초에 워프, 기억 삭제가 상식적인 부분은 아닌 만큼, 우리에게는 잠깐이지만 버튼을 누른 사람에게는 그 잠깐 동안 5억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공간으로 워프 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버튼을 누른 순간 워프가 되고, 누르고 1초 뒤에 다시 돌아온다고 가정을 해본다면, 1초 동안 5억년을 경험하고 돌아온다고 볼 수 있겠죠. (사실은 0.1초 나 0.0000000001 초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거나 그거나)
요점은 버튼을 누른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공간으로 워프된다는 것. 워낙 짧은 시간에 왔다 갔다 하기에 주변에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발생하는 논쟁거리 하나.
그럼 내가 직접 5억년을 경험해야 하는 건데, 기억이 지워진다고 해도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요? 실제로 경험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뭐가 어쨌든 간에 나 자신이 5억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에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라는 의견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5억년을 어떻게 보내냐는 말이죠.
동감입니다. 5억년을 직접 어떻게 보내요.
기억을 잃든 어떻든 저는 5억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보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말합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이야기가 아무 의미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한마디.
"근데 결국 기억이 지워진다잖아요."
이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어찌 보면 치트키로 보이는 개념.
5억년의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수많은 의견이 쏟아집니다.
기억이 지워지는데 안 할 이유가 있나?
기억을 지웠다면 과연 경험한 게 맞나?
기억을 잃었어도 경험한 건 나 자신이 맞지 않나?
기억을 잃어도 경험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게 맞는 것 같고...
기억을 잃는다는 전제.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주제로만 지금 며칠째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군대에 비유하는 글이 많더군요.
군대에 다시 가야 해. 기억은 지워준대. 갈 거야?
미쳤어? 절대 안 하지. 기억 지우는 게 뭔 상관이야. 절대 안가.
사람들은 군대에 안 좋은 기억이 많기에, 기억을 지워준다 해도 본능적으로 거부를 합니다.
질문을 살짝 바꿔볼까요?
당신은 20살이 되어 군대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 버튼을 누르면 복무 기간을 0.1초로 줄여주고,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안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 힘든 시기를 스킵 해준다는데?
이 만화의 질문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군대든 5억년이든 그 어떤 힘든 일이든 시간도 단축해 주고 기억도 지워준다는데, 안 할 이유가 있을까요?
또 다른 생각으로는,
기억이 지워진다는 게 대체 뭐야? 라는 생각.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저는 참 안타깝게도 6살 때까지의 기억은 아예 없습니다. 단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아요. 7살 때부터는 유치원을 다녀서인지, 기억이 나는 장면이 한두 개 정도는 있습니다만 그전의 기억은 아예 없어요.
1살~6살의 기억은 지워진 겁니다.
기억이 지워졌기에, 그 당시의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현재의 나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5살 때의 저는 자전거 바퀴에 발이 걸려서 크게 다쳤다고 해요. 지금도 발목 쪽을 보면 수술한 자국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죠. 엄마가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평생 모를 기억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사실 몰라요. 엄마 말을 믿을 뿐.
이 사실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줄까요? 아니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뭐 그런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죠.
기억이 지워진다는 건 이런 겁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인지조차 못하는 것.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것.
5억년을 보내든, 50억년을 보내든
결국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건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기억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글이 있었습니다.
철학과 교수님이 이 만화를 보고 한 말씀이라는데요,
저는 철학적인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있더군요.
기억이 삭제되는 순간 5억 50살의 나는 죽는다. 천만원을 받는 현실 세계의 나는 5억 50살이 아니라 50살의 나다. 즉, 돈을 받는 건 내가 아닌 나와 완벽하게 동일한 기억을 가진 50살의 타인이다.
기억이 삭제되는 순간 내가 아니라는 내용인데요.
음... 그럼 6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같은 사람이 맞죠. 갑자기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결론,
저는 하루 종일 버튼을 눌러 돈을 복사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