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숙집 고양이 Aug 14. 2024

잠자는 고양이의 코털을 건드리다.

승자 없는 싸움

오늘 드디어 고등학생 둘이 등교했다.

긴 여름 방학도 끝나고 드디어 개학이다.

아이들은 툴툴대며 학교에 갔지만

삼시 세 끼(엄밀히 말하면 늦잠으로 두 끼가 많았음)의 지옥에 갇혀 지내다

해방된 것이 너무 좋다.


아직 이 고통에 계신 분들에게는 죄송.


그래서 아이들의 등교로

외로워할 제리를 위해

캣닢 장난감을 새벽배송했다.


더불어 츄르도 잔뜩 챙겼다.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가는

방학 첫날 제리는 너무 기뻐 보였다.

남편의 휴가도 그 무렵이었는데

다 집에 있으니 첨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 아들의 하교만 기다리던 제리가

아니었던가.

근데 얘가 계속 집에 있는 거다.

사실 학원과 독서실을 끊었음에도

늦잠을 즐기는 터라


늦은 오후에야 독서실에 가서

낮에는 집에 있으니


그게 그리도 좋았던 모양이다.

희한하게도 낮에 깨어 노는

제리를 보게 되었다.


특별히 놀아주는 것도 없는데

그게 좋았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는

나도 좋았다.

근데 올림픽이 사달이었다.

새벽에 경기를 몰래 본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잠을 못 잔 제리와

애들의 낮밤이 바뀌더니


급기하 새벽에 쌩쌩해진

제리가 1시간 단위로 날 깨우기 시작했다.


첨엔 그러려니 했는데

제리는 다각적인 방법으로 날 깨우기 시작했다.


팔목을 물었다 놓기

다음은 가슴에 올라타 꾹꾹이

다음은 귀 옆에서 울기


삼시 세 끼에다가 야식 설거지로

지칠 대로 지친 나는 큰 맘을 먹었다.

이에는 이다.


잠을 깨우면 나도 깨우면 되지.

베란다에서 곤히 자는 제리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맞다. 잔인한 처사였다. 물론 안다.

근데 그때는 잠을 많이 못 자고 그래서 생각이 짧았다.(진지하게 변명 중)


자고 있제리의 턱에 살짝 손을 대며

"제리 낮에 자꾸 자니까 밤에 못 자지."

근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녀석 진심 눈을 내리깔고는 누워서 일어나기는커녕 꼼짝 않고 입으로

험하게 으르렁 거리는 거다.


흠칫 놀라 손을 걷었다.

제리도 잠이 좀 깨자 눈을 똑바로 뜨고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아니다.

물론 무서웠던 것이 아니라,  하, 맞다. 무서웠다. 진심으로 무서웠다.

하극상을 당한 느낌이었다.


애들에게 달려가 내가 당한 처참한 사건에 대해 어른답지 못하게 일러바쳤다.


"어디 함부로 으르렁 거려. 버릇을 고쳐놔야."

딸애는 웃고 있었다. 아깽이 때 딸애의 거친 장난에 제법 으르렁과 깨물기

대상이 되었던 터라 내가 당한 것이 설마 재밌는 건가.


"그러게 버릇을 꼭 고쳐놔요. 오늘 예뻐하지 말아요. 모르는 척하라고요."

그런 무서운 미션을 주고는 늦은 학원행. 아들도 으르렁을 당해본 경험자였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나만 그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남편이야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제리가 서열 밑으로 보는 쪽이다 보니.


오 그렇담. 철저하게 무시해 주겠어.

(옹졸했지요. 압니다. 사람이란 그럴 때가 있죠. 밴댕이 소갈머리를 보일 때가. 딱 그때였던 겁니다.

거기 야유는 삼갑시다.)


제리는 분위기를 금방 파악했다.

우선 날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르지 못했다.

꼬리를 한껏 내리고 움직이다 내 시선과 조금이라도 마주치면 꼬리를 흔들었지만

이내 무시당했다. 밥은 주었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궁디팡팡도 없었다.


제리는 말없이 내가 보이는 곳에 가만히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덥고는 올라오지 않던 소파에 올라와 내 쪽으로 다가왔지만

이내 내려갔다.

마음이 이상했다.

저 작은 생명체를 상대로 내가 하는 짓이 야비했다.


이 무슨 승자 없는 싸움이란 말인가.

싸움을 시작한 지 10분, 난 그만 내 편에서 지기로 했다.

우선 이 귀여운 생명체를 모른 척하기는

내게 고문이었다.


난 제리를 불렀고 제리는 펄쩍 반 원을 그리며 복도를 뛰어갔다.

우르르릉 신날 때 내는 소리를 계속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발 박수도 치고 내 다리 사이를 지나다니며 꼬리로 감는다. 세리머니를 하는 거다.

제리와 나의 냉전은 그렇게 10분 만에 해제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고양이는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 잔다고 해도

숙면하는 시간은 굉장히 짧다고 한다.

고양이는 자세를 다 널브러뜨리고 자면

숙면 시간인데 이 때는 깨우면 안 된다.

고양이의 긴 수면시간에도 깊은 잠과 얕은 잠으로 나뉘어 있고

대부분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얕은 잠을 자서

위기가 닥칠 때 항상 달아날 수 있게

앞발을 쪼그려서 잔다.


그 앞발이 완벽히 펴져 있는 자세

그게 숙면인 거다. 달려 나가기 위해 몇 단계가 필요한 자세니까.

결국 숙면을 할 때는 깨우면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제리 미안해

잠자는 호랑이코털을 건드리는 위험한 행동은 제리가 아니라 내가 한 거였어.

용서해 줘. 캣잎 장난감과 츄르를 대신 줄게.


이전 15화 고양이는 꼬리로 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