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_4 #콩쿨 #길거리피아노 #피아노책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정리 중인데, 피아노 역시 목록에서 지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피아노는 내 기분을 더 나아지게 만든다는 엄청난 최강 장점이 있다! 지금 기분이 -30이라면, 피아노는 나를 +30까진 아니더라도 -10쯤까지는 올려준다. 기분이 +40이라면, 피아노를 치고 나서는 +60쯤 되는 것 같다. 어떤 기분일 때든 피아노를 치고 나면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일단 그 많은 세상의 색 중 하얗고 까만색으로만 이루어진 건반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생각이 벌써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5살 때부터 피아노 앞에 앉으면 신기한 게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한 번도 피아노 앞에서 작아진 적이 없으며 즐겁고 당당했다. 7살 때 KBS 피아노 경연대회를 나갔을 때도, 고등학생 때 피아노로 반 전체 노래 수행평가 반주를 쳐줄 때도,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동아리 공연에서도. 그렇게 피아노에 자신 있으면 직업으로 하지? 직업으로 하지 않은 이유는 제일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두라는 말에 바로 수긍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가끔 후회할 때도 있었지만, 콩쿠에 참여한 후로 나는 그 후회는 싹 접게 되었다. (뭐든 최강 난이도를 겪고 나면 더욱 도전하고 싶어 지는지 아니면 바로 수긍하고 접어둘지 정해지는 법이다.)
스타인웨이 아마추어 피아노 콩쿠에 참가했었다. 앉자마자 그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긴장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되어서 그동안 내가 피아노 앞에서 당당했던 건 이게 취미라는 것 때문이란 걸 단번에 깨달았다. 콩쿠르에선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심사위원 평을 얻은 것이 상을 탄 것만큼 큰 울림이 있었다. 암보(악보를 안 보고 외워서 연주하는 것)하여 연주한 참가자가 많았는데, 외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악보를 봐도 되니 음악을 즐기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취미로 하는데 공부하듯 암기하는 것에 애쓰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 앞으로 내가 피아노를 대해야 할 자세로 보였고, 참가자들 대부분에게 그렇게 빛을 비추어 준 것 같이 느껴졌다.
참가 신청을 하고 급하게 숨고로 피아노 선생님을 찾아 레슨을 받았다. 선생님께 레슨 받으며 들었던 말들이 집에 오는 길 내내 귓속에 맴돌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피아노를 치나요? 한 음 한 음 느려도 좋으니 또박또박 눌러서 쳐보세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내 삶의 여유 없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한 음씩 누르지도 못하고 그저 음표들을 치워나가기에만 바쁜 날들. 그 후로 피아노를 칠 때마다 그 말이 떠오르게 되었다. 감사한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내가 유럽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은 나라 2위인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를 공부하셨는데 유럽 생활, 명품에 대한 가치관까지 나와 비슷해서 말이 정말 잘 통했다. 피아노라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을 만나 친구로 사귀는 게 제일 쉽다.
예전 브런치에서 언급한 내가 쓴 책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QR코드를 찍으면 이야기 100개에 걸맞 분위기로 내가 자작한 피아노 곡을 들을 수 있다. https://mp3.englishbus.co.kr/english_for_travel/ 전문적으로 작곡을 하진 못하지만 각 이야기의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작곡해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때의 기분을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나중엔 작곡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당근마켓을 보면 작곡을 가르쳐준다는 글들이 많이 보이는데, 잔뜩 즐겨찾기에 저장해 두었다. 언젠가는 여행지를 다니며 각 도시에서 느낀 감정을 음악으로 담아내고 싶다. 하고 싶은 걸 정리한다면서 더 추가하는 건 뭔데?
여행을 다니다 보면 피아노만 보면 무조건 가서 치고 싶은 병에 걸린 것 같다. 런던, 파리, 잘츠부르크, 서울 시내 어느 카페든 길거리든 피아노가 있으면 망설임 없이 앉아서 연주한다.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주 연주하다 보니 긴장감의 역치가 많이 낮아졌다. 덕분에 남 앞에 서는 웬만한 일에는 긴장이 잘 되지 않는다.
피아노를 치는 것만큼이나 피아노에 관한 책 읽는 것도 좋아한다. 'PHONO포노' 출판사에서 나오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에 관한 책들은 웬만한 철학책이나 자기개발서보다 더 깊이 있는 통찰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이야기까지 있으니 일석이조다. '베토벤, 그 삶과 음악(제러미 시프먼 저)' 중 이런 문구가 나온다. "크레센도 같은 것을 잘못 표현할 때나 그 작품의 성격을 잘못 판단할 때면 그(베토벤)는 화를 냈다. 계이름을 틀린 것은 베토벤 자신도 틀릴 수 있는 것이고 실수이지만 이런 잘못은 작품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 주의의 부족 탓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작곡한 대로 작품의 주제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을 강조했다. 반대로 '아무튼 피아노(김겨울 저)'에는 조성진과 지메르만의 쇼팽 레코딩을 대조하며 다른 고유한 해석을 비교해 보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선 연주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곡을 해석한다고 한다. 베토벤이라면 이 말을 싫어했을까?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의 오늘 결론은 다른 악기는 하지 않되, 피아노만 남겨두겠다! 5살부터 피아노를 배운 덕에 절대음감이 있어서 어떤 노래든 두 번만 들으면 칠 수 있긴 하다. 그래서 바이올린도 킬 줄 알고 대만에서 들은 오카리나 연주에 반해 배워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일단은 접어두기로 했다. 피아노 하나만 남겨두기. 그것이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데 한 음 한 음 꼭꼭 누르며 곱씹는 시간은 남겨둬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