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분야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금도라는 게 있습니다. 불교사원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불러서는 안 되고, 성당에서 종묘재례악을 연주하면 곤란합니다. 8월 15일 광복절에 K방송국에서 오페라 <나비부인> 공연실황을 녹화 방송했습니다. 일본은 가해국입니다. 나비부인이 아무리 걸작이라도 '피해자 코스프레' 내용을 담은 오페라를 광복절에 방송하는 것은 선을 넘은 행위입니다.
오페라 원작가는 미국인
이 오페라는 푸치니가 미국 작가인 존 루터 롱의 원작소설 <나비부인>을 모티브로 작곡하였습니다. 강대국 미국 남자 핑커튼이 약소국 일본에 머무는 동안, 현지 여인 쵸쵸상과 책임감 없는 결혼을 한 후 미련 없이 버리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세계를 쥐락펴락 하는 미국의 막강한 힘을 자국민의 입장에서 은유적, 비판적으로 묘사한 소설이죠. 사실 일본인 시각에서 쓴 원작은 아닙니다.
오페라 초연 당시 일본의 만행
그렇다고 일본이 이런 피해자의 입장을 대표할 만한 나라는 더욱 아닙니다. 이 오페라가 초연된 1902년 전후로 일본은 한국에게 명성황후 시해(1895년), 을사조약(1905년), 한일합방(1910년)이라는 치밀하게 계획된 침략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에게 굴욕감 준 치욕의 기간이었죠. 섬나라 일본은 늘 제국주의의 깃발을 들고 대륙국가들을 무력 점령할 음흉한 목표를 품고 살아온 자들입니다. 이런 일본이 갑자기 이 오페라에서는 마치 자기들이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피해국처럼 비친 것이죠.
극 중 <기미가요>가 이슈가 된 이유
게다가, 이번에 문제가 되었던 극 중 음악'기미가요(일본국가)'는 쵸쵸상과 핑커튼의 결혼식에서 연주됩니다. 상상을 해봅시다. "나의 결혼식에 애국가가 연주된다?" 어이없는 헛웃음만 나올 겁니다. 그러나 이 오페라의 장면을 보는 일본인들 입장은 다를 수 있습니다. 결혼식에서도 '기미가요'가 울려 퍼질 만큼 천황폐하와 국가에 대한 절대복종과 충성심을 가졌던 당시 상황을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죠.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1위가 <나비부인>인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겁니다.
광복절에 송출하지 말았어야 할 오페라
그러하기에, 이 땅 대한민국 광복절에는 분명 나오지 말아야 할 음악이었습니다. 알고도 방송을 했다고는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고, 만약 실수로 보냈다면 해당 방송사의 문화적 기본 소양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는 정치에 문외한 일개 음악가에 불과하지만, 국가 간이건, 국내 문제이건, 개인 간이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행위 정도는 분별할 줄 알고, 이에 대해 참을 의향도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히, 방송사 측에서 공식 사과는 한 걸로 보이긴 합니다.
덧붙임. 작품으로써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어떠한 극찬도 부족할 만큼의 대작입니다. 그의 오페라 가운데 최다수로 세계 무대에 올려지고 사랑받아 온 작품입니다. 비련의 여주인공이 사랑으로 인해 비극적 결말이 나는 낭만주의 대표 러브스토리를 품고 있죠. 이 작품 속 음악들도 들을 때마다 황홀감을 줄 만큼 빼어납니다. 원작가도 미국인이므로 작품 자체의 가치에 대한 오해는 없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