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40대에 헐리웃에 진출했던 많은 유럽 감독들은 전후 세대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인간이 끔찍하다는 것을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유럽 멸망 보고서나 다름없는 전쟁을 보면서 체험한다. 특히 네덜란드는 그 위대하고 파렴치한 식민지 시대가 종식되면서 독일 나치에게 본토를 점령당하고 20만 명이나 학살당하는 비운을 맞이한다.
그래서인지 전후에 네덜란드 영화감독들의 영화는 그 잔인성에 있어서 다른 나라 감독들과의 시각이 워낙 달랐다. 마치 누군가에게 복수를 원하는 듯한 핏빛 화면들은 그들의 전유물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의 한 명이 바로 폴 버호벤 감독이었다.
이 감독의 첫 헐리웃 데뷔작은 < Robocop >이라는 SF 범죄액션물이었다. 3탄까지 나온 후 다시 리메이크될 정도로 1탄은 엄청난 대박 흥행을 한다. 물론 2탄이나 3탄, 그리고 리메이크는 볼 품이 없었지만 말이다.
폴 버호벤의 헐리웃 데뷔작을 < Fresh + Blood > 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 영화는 합작 영화로 영어로 제작되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정확한 데뷔작은 이 < Robocop >으로 보는 것이 맞다.
< Robocop >은 한국 극장에서 개봉할 당시 많은 장면이 가위질당했다. 수입하는 회사에서 청소년 관람가를 원한 것도 있었지만 워낙 잔인한 장면들이 많아 당시에 있던 영등위 (영화등급위원회)도 잔인한 장면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개봉을 허락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영등위의 허가를 받지 못한 작품은 개봉을 할 수가 없었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정치적인 스크린 검열기관이 한국의 80년대 극장가를 장악하던 시절이었다.
난 이 영화를 극장에서 한번 보고 나중에 삭제되지 않은 블루레이판으로 관람하였는데, 이 두 영화의 느낌이 정말 천지 차이였다. 그 잔인성과 폭력성에 있어서 무삭제판이 훨씬 강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첫 장면에서 주인공인 피터 웰러가 범죄자들에게 총살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극장판은 장면을 거의 다 삭제했는데 블루레이 판에서는 손목이 날아가고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날아가는 장면이 여과 없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헤드샷까지 말이다. 주인공이 얼굴만 빼고 나머지는 로봇과 결합한다는 설정 때문에 당연한 씬일지도 모르지만, 그 잔인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감독의 잔인한 상상이 없다면 불가능한 연출이다.
그 외에도 갱 두목의 목에 데이터 접속 송곳을 쑤셔 넣어 피가 터지는 장면이나 갱 멤버 한 명이 화학물질 통에 빠져 죽어가는 장면 등은 당시에 잔인함의 극치로 여겨지곤 했다.
CG가 없던 시대에 특수 효과만으로 이를 표현했으니 현장에서도 많은 스태프들이 감독의 잔인한 표현에 혀를 내둘렀다.
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가장 고생한 사람은 주인공인 피터 웰러였다.
헐리웃 영화의 단점 중 하나는 연기 잘하는 배우를 데려다 놓고는 온갖 특수 분장과 촬영으로 그들의 재능을 우려먹고는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이다. < Robocop > 의 피터 웰러가 그렇고, < Terminator 2 >의 로버트 패트릭이 그랬다. 피터 웰러가 < Robocop >에 주연으로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장 말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보캅 헬멧이나 장갑들을 그의 몸 위에 장착하기 편했다. 그는 이 역을 위해 로봇처럼 연기하는 것을 수개월 동안이나 연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우리가 잭 니콜슨이나 폴 뉴먼 세대와 같은 '메쏘드 연기법'이었다. 그만큼 그는 이 역에 대해 진지했고, 극 중에서도 자신의 인간적인 정체성과 로봇이라는 실존사이에서의 고뇌를 누구보다도 잘 표현한다. 그래서, 그가 대단한 연기자인 것이다.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를 몸으로 음성으로, 눈빛으로 표현할 수 있기에. 하지만 이 영화 이후 피터 웰러는 < 스크리머스 >를 비롯한 몇 개의 SF 영화와 액션 영화에 출연하는 것에 그친다. 로보캅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강했고, 너무 크게 흥행했기에 그 이상을 보여주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 아마 틴틴파이브라는 개그맨들이 로보캅의 움직임을 흉내 내던 개그물을 했었던 것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거다. 그럴 정도로 피터 웰러의 기계적인 움직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데, 그만큼 그가 대단한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
폴 버호벤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파간다(정치적 구호)에 대한 풍자나 미디어에 대한 비평, 혹은 대자본의 횡포에 대해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 Robocop >이 그렇고 < Starship Troopers >가 그렇다. 그리고 < Total Recall > 에서도 자본의 이익을 위해 대중을 속이려는 프로파간다가 여과 없이 나온다. 그러면서 관객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미디어가 과연 진짜인지를 질문으로 던진다. 1980년대에 말이다. 많은 인터넷의 정보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 어떤 게 진짜인지를 모르는 세상이다. 그리고, 1980년대에 폴 버호벤은 이를 예측이라도 한 듯 미래의 미디어들을 비판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단순한 상업 영화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모든 정보는 자본의 이익에 충실하기 위해 가공되고 뿌려지는 세상인 것이다. 마치 지금의 미디어를 예언하듯 한 그의 방식은 그래서, 1인칭 시점이나 미디어 화면으로 표현될 때가 많다. 1인침 시점은 항상 모니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고, 미디어 화면은 뉴스라기보다는 기업이나 정치인들의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 Robocop > 스토리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로보캅에게 입력된 마지막 프로토콜 명령일 것이다. 절대 OPP (미래의 대기업, 영화 내에서 빌런) 직원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배후 조정자가 이를 이용해 살아나가려 하자 회장이 'You are fired (넌 해고야)'를 외친 후 로보캅이 그의 몸에 총알을 박는 것으로 마지막을 맺는다. 이 부분이 기억날 수밖에 없는 것은 미래의 권력자들은 누구인가를 바로 보여주는 것으로, 기술과 자본으로 무장한 그들은 언제든지 back door 나 secret code를 숨겨둘 수 있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것도 그 자본의 총수나 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이런 부분을 생각해 촬영을 한 것도 놀랍지만, 그런 부분이 지금의 상황과도 여전히 맞아떨어지니 더 놀라울 뿐이다.
이 영화를 단순한 액션 영화로만 본다면 안 봐도 된다. 그 당시의 액션 장면은 지금 CG 몇 개만 동원해도 금방 만들 수 있는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감독들은 촬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재미적 요소나 세계관을 집어넣으려 애썼고 이 영화도 그런 영화 중 한 편이기에 보셔도 후회는 안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