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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 Aug 31. 2024

로버트 저메키스 (2)

38. Who Framed Roger Rabbit.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섹시한 캐릭터 중의 한 명은 실사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친 영화의 만화 캐릭터인 '제시카 래빗'이 그 주인공이다. 이 사랑스럽고 섹시한 팜므파탈은 그 디자인만으로도 영화사에 이름을 남기고, 아직도 디즈니랜드에서 관객들을 환영하는 캐릭터이자 많은 배우들이 그녀의 모습을 코스프레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이 캐릭터를 탄생시킨 < Who Framed Roger Rabbit. (누가 로저래빗을 모함했나) >은 미국에서 1988년에 개봉했고, 한국에서는 1990년에 개봉해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 영화는 800명에 달하는 제작진과 18,000 프레임이라는 엄청난 양의 필름을 소모하며, 당시에 < Total Recall >이 찍은 최대 제작비를 가뿐히 넘기고 7천만 달러라는 돈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미 < Back to the Future > 에서 합을 맞춘 스티븐 스필버그와 로버트 저메키스에게 있어서 이런 제작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오직 이 영화에 출연할 디즈니와 워너 브러더스의 만화 캐릭터들에 대한 판권 문제뿐이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개봉 후 전 세계적으로 3억 2천만 달러의 수익을 벌어들인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장르나 스토리보다는 그 기술적 진보에 있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가 합쳐지는 영화는 디즈니에서 여러 번 시도한 것이었다. 1944년에 만들어진 < 3인의 기사 >는 도날드 덕을 내세워 만든 합성 영화였지만 실사 부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20년 뒤인 1964년에 만들어진 < 메리 포핀즈 >는 뮤지컬 영화의 명작이자 고전으로 남으며 흥행을 하지만, 실사와 애니메이션 부분이 전혀 맞지 않았다. 여전히 배우들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1977년에 개봉한 < 피터의 용 >도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이 매끄럽지 못했다.

하지만 < Who Framed Roger Rabbit >은 달랐다. 배우들의 시선은 완벽하게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가 있으며, 그들의 액션은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황당한 액션과 잘 맞아떨어지도록 철저히 설계되었다. 과거의 작품들이 어디서 어설프게 보였는지 철저히 연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에 있던 모든 영화기술들이 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이때만 해도 여전히 영화계에서 CG (Computer Graphic) 기술은 없었던 때였다. 1991년에 그나마 < 터미네이터 2 >가 몰핑 기법을 이용해 T1000 을 실사에서 재연하며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 3년 먼저 개봉한 영화이다. 그런 시기에 장인 정신으로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완성시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인 것이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지분은 애니메이션 감독인 리처드 윌리엄스에게 있다. 이 영화는 로버트 저메키스 영화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 애니에이션 감독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 감독은 다작을 한 감독은 아니다. 게다가 워낙 애니메이션에 진정성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던 감독이라 상업적으로는 환영을 받지 못한 감독이기도 했다.

그가 제대로 연출한 작품은 < 욤욤공주와 도둑 (The Thief and The Cobbler (1995) >이란 작품인데, 이 작품도 정말 기가 막히다. 이렇게 워너 브러더스 애니메이션을 극한까지 개발한 감독은 리처드 윌리엄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고, 이 < Who Framed Roger Rabbit > 도 그런 워너 브러더스식 애니메이션 액션과 기법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감독은 < Who Framed Roger Rabbit >으로 오스카상을 타게 되는데, 그게 리처드 윌리엄스를 가장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끈 작품이기도 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큰 역할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해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투자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디즈니와 워너 브러더스 관계자들을 만나 < Who Framed Roger Rabbit >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캐릭터를 쓰겠다고 설득한다. 이 일은 정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물론 디즈니가 미국 애니메이션계의 압도적인 일인자였지만 워너 브라더스의 많은 캐릭터들도 이에 못지않았고, 이들은 마치 코믹스 만화 부분의 DC 와 Marvel 처럼 보이던 때였다.

디즈니에 미키 마우스가 있으면 워너에는 벅스 버니가 있었고, 도널드 덕은 대피 덕으로 비견되던 때였다. 하지만 절대로 같이 나오지는 않았다. 회사가 틀리고, 저작권자가 틀리기에. 그런데, 그런 역사적인 일이 이 영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피 덕이 그 수다스러운 입으로 '꽥꽥'거리며 말도 못 하는 도널드 덕을 디스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장면을 직접 연출해 낸 것이다.  

이런 애니메이션계의 양대산맥 캐릭터들이 모두 카메오로 출연하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최고 흥행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자로 나서서 두 회사를 설득했기에 가능했다. 이 이후로 디즈니와 워너 캐릭터가 함께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내가 아는 한 없었다.  


이 영화의 플롯은 소위 말하는 범죄 느와르 장르를 빌리고 있다. 과거의 명탐정은 PTSD 로 인생 낙오자로 살고 있고, 순수한 사랑을 하지만 겉모습은 전형적인 팜므파탈임을 감추지 않는 여주인공, 거기에 흥행 배우지만 순수한 감정의 소유자이자 의뢰인인 남주인공, 마지막으로 순수한 악의로만 가득 찬 악당까지. 캐릭터들도 이런 장르에 나오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이다.

내용 또한 < 차이나 타운 (로만 폴란스키, 1974년작) > 처럼 탐정에게 의뢰인이 찾아가 배우자의 불륜을 염탐해 달라는 것이다. 배우자의 불륜 의뢰가 어마어마한 음모로 이어지는 것은 < 차이나 타운 > 이후 많은 범죄 느와르가 밟아 온 클리세이다.

이렇게 플롯 자체는 클리세적인 요소가 많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클리세로 끝나지 않는다.

캐릭터 자체가 이미 만화로 이루어진 세계관이기에 만화 캐릭터와 실사 캐릭터의 경계를 통해 끊임없는 반전을 이루어 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사는 '제시카 래빗'에게서 나온다. 

'I'm not bad, I'm just drawn that way. (난 나쁘지 않아요. 그렇게 그려졌을 뿐이지.)'

이 말처럼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본질을 관통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캐릭터이기에 이 대사가 가능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대사가 내 마음에 와닿은 것은 영화의 캐릭터들이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 감독이 애정을 가지고 창출한 캐릭터들의 본질이 바로 이 말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셀 수도 없는 캐릭터들이 창조되고 파괴된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들이 카메라 뒤편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을 '제시카 래빗'이 화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직접 이야기한다. 내가 나쁜 팜므파탈로 보이냐고. 난 그냥 그려진 캐릭터일 뿐이라고.   

그리고 이 대사 하나만으로 '제시카 래빗'은 실사 영화에 나오는 어떤 캐릭터보다 강력한 'Reality' 를 가지게 된다. 아니, 오히려 웬만한 실사 영화 캐릭터보다 더 현실적인 인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게 영화가 가진 힘이고, 감독이 가지는 능력일 것이다.


이 영화 이후로 실사와 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들은 많이 시도되고, 제작되었다. 특히 그중에 브래드 피트와 킴 베이싱어 (킴 베이싱어는 만화 캐릭터로 나오고, 브래드 피트는 실사로 나온다.) 가 나오는 < Cool World > 나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을 내세운 < Space Jam > 등이 유명하다.

< 쿨 월드 >는 엉망인 플롯과 캐릭터로 인해 중구난방의 애니메이션 액션만 난무하는 영화였고, < 스패이스 잼 >은 농구판에서는 유명했을지는 몰라도 영화판에서는 문외한인 유명 농구인들을 긁어모으는 바람에 연기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특히 < 스패이스 잼 >의 워너 브러더스 캐릭터들은 진지한 세계 멸망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코메디 액션을 마음껏 펼칠 수도 없었다.

두 영화 모두 비평이나 관객들의 리뷰에서 거의 최악의 평점을 기록하는데, < 스패이스 잼 >은 그나마 흥행에는 성공해 체면 치례를 한다.

그리고, 이후로 CG 애니메이션이 발달하고, 실사에서도 CG가 대거 차용되면서 이런 실사와 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는 나오지 않게 된다.


20세기에 CG 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때에는 모든 것이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 Who Framed Roger Rabbit >은 그런 손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거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지금도 아무리 CG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처음에는 손과 디지털 펜을 이용해 디자인을 완성하지만, 이후에는 모든 것이 CG로 완성된다.

하지만 < Who Framed Roger Rabbit > 은 1980년대에 손으로 시작해 손으로 완성한 순수한 필름 영화였고, 거기에는 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800여 명 제작진의 고군분투가 있었다. 지금이야 훨씬 더 적은 인원으로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단순히 아날로그 감성을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실체에 가장 근접한 영화이기 때문에 추천하고 싶다. 영화의 캐릭터라는 것이 손으로 그려지든 배우가 연기를 하든 감독이 부여하는 'Reality'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감독이 실수라도 한다면 캐릭터의 진정성은 절대 관객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 저메키스는 뛰어난 연출 능력을 가진 감독 중 한 명이었다.

이 영화는 꼭 보시길 바란다. CG 에 익숙한 사람일지라도 이 영화가 가지는 'Reality'에 정말 놀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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