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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대나무 숲!

by 구름마중

그리 춥지 않았던 겨울, '입춘'이 지나서야 한파가 찾아왔고 몇 시간씩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은 고요하다. 묘 할 정도로 차분한 날씨에 다 마신 컵을 개수대에 내려놓고 한 손엔 다 채우지 않은 종량제 봉투, 다른 한 손엔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1층 현관문을 나선다. 자동문이 열리고 특종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들이닥친 듯 찬 공기가 나를 에워쌌다. 날씨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 뽀얀 입김을 뽑아내며 허공에 대고 "춥다! 추워"

찬 공기 사이를 뚫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빠르게 걸어 분리수거장에 도착했다. 그래야 1분도채 걸리지 않은 시간이지만 얼음처럼 차디찬 공기가 내 온몸 구석구석을 시리게 한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나는 나뭇가지처럼 굳어버린 손가락 하나를 펴서 버튼을 '띡' 누른다. '20, 19, 18...'

움츠린 등과 어깨를 간신히 펴고 몸을 부르르 떠니 진동이 턱까지 느껴진다. 춥다!


1층까지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속도가 이렇게 더디었던가! 순간 여름에 비축해 두었던 뜨거운 태양과 땀, 자전거를 타면서 느꼈던 바람이 뒤퉁수(해마) 어디에선가 스치며 '맞아 여름은 또 얼마나 더웠어!' 그날에 할머니를 기억해내고 말았다.


그날은 여름의 끝자락이다. 평소처럼 무척이나 덥고 바람 한 점 없었다. 더위와 집에서 싸우자니 힘도 없고 자전거라도 타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바람과 작정하고 땀을 내고 씻는 기분이 꽤 괜찮아 가방에 사과 하나, 두유를 챙겨 벚꽃길을 따라 자전거를 탔다.


출발할 때 저 멀리 서쪽 하늘에 하얀 구름이 가득했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뭐 타고 오는 동안에는 괜찮겠지 하고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이십여분쯤 노래와 주변 풍경에 빠져 달리던 중 옆으로 힐끔 보이는 서쪽하늘에 구름은 비가 되어 당장이라도 퍼부을듯한 기세였다. 엄청난 속도로 따라붙는 비를 피하고자 '집으로 돌아갈까? 비를 맞으며 탈까? 비를 피할까?' 마음의 지름길에 선 나는 순간 판단력으로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저 멀리 정자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다. 빠른 판단력으로 비를 맞지 않고 정자에 도착하면서 이내 빗방울은 굵은 장대비로 바뀌었다. 바람도 불어 정자 안쪽까지 비가 스쳤다. 정자 끝으로 몰린 나는 이미 그곳에서 비를 피하는 할머니와 어색하지만 입가에 미소로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곧이어 달리기를 하던 젊지만 젊지않은 남자도 우리와 함께 정자에 모이게 되었다.


어색한 사이에서는 먹는 게 최고다. 가방에서 사과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손으로 잘라 달라고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티를 내며 부탁을 했고 사과는 불규칙한 삼등분이 되었다. 사과를 받은 남자는 정자 끝으로 가서 어색하게 서성이이며 사과를 먹었다. 다른 사과 한조각을 들여다보며 '이가 괜찮으실까? 씹기 어렵지 않을까?'하는 염려로 조심스럽게 내민 사과를 할머니는 흔쾌히 받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아삭아삭 씹히는 사과소리에 어색함은 잠시 물러가고 사과에서 나오는 과즙에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어디서 왔냐?' 하며 이야기 첫 단추를 풀기 시작하며 남자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데 최근 몸이 안 좋아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일을 쉬면서 우울증이 왔는지 이렇게 산책이라도 해야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해서라도 손주들 용돈을 주는게 낙이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맞장구였다. "그러셨구나", "힘드셨겠어요"


사과를 다 먹고 가방에 있는 두유를 꺼내 할머니 앞에 놓았다. 할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고 한다 그러면서 갑자기 옛 생각이 났는지 시집오기 전 할머니의 과거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무것도 없던 시가에 밤낮없이 식당일을 해서 자식 둘을 키웠고 모진 시가생활을 하며 지금에 집터를 지키고 있다고 할머니의 짙고 어두운 세월 속을 내가 알리는 없겠지만 나는 정성껏 들어주는 것이 할머니에 대한 예의였고 할머니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인간이었음을 기억해 주고 싶었다.


할머니 인생이야기가 결말에 도달했을 때 내 시선은 할머니 손톱에 닿았다. 분홍네일이 닳고 닳아 끝자락에 남겨진 모습을 보니 '참 엄마처럼 꾸미는 것도 좋아하셨겠구나'생각했다. 그러면서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아빠 없이 다섯 형제를 출가시키면서 한 번도 힘들다고 하지 않고 힘듦을 버팀으로 버팀 속에서도 엄마 스스로를 꾸미는 소소한 것에 큰 위안을 사기도 했다. 할머니도 아마 그랬을까! 할머니 이야기는 점점 무르익어 현재 손주들의 대학금을 지원해 주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신다. 그러면서 할머니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번진다.


장대비는 점점 이슬비로 바뀌면서 이내 멎었다. 처마 끝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모래와 흙인 섞인 자리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위치마다 작은 구멍처럼 파여있다. 서쪽하늘에 볕이 들기 시작했다. 오색기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할머니 지금 너무 대단하세요! 정말 열심히 사셨어요!"

"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별소리를 다했구먼, 동네 사람한테는 창피해서 말할 수 없어" 눈가에 촉촉한 눈물을 닦아내며 할머니가 말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 끌어안고 있던 이야기를 가끔은 후련하게 털어놓으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때가 있다고 그리고 실컷 울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청소되듯 깨끗한 기분이 든다는 것을. 아마 할머니도 그랬으면 좋겠다.


겨울의 끝자락도 이제 봄으로 향하고 있다. 곧 찾아올 봄과 여름, 다시 산책할 할머니를 만나면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잘 지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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