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People don't really want change, especially not if it costs something.” (Raymond Khoury)
커피 한잔 사 오는 게 그렇게 귀찮은 건지 몰랐다.
글로비스에서 신사업으로 로봇커피배송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스타트업에서 로봇을 수급한 후 사옥에서 임직원 대상 시범 서비스를 2년 가까이 운영했다.
이런 류의 서비스를 PoC(Proof of Concept)라고 불렀다.
사업 아이디어가 동작하는지 실제 사업과 유사한 환경에서 테스트를 해보는 것이다.
서비스는 이랬다.
임직원들은 사내 인트라넷 App을 통해 커피를 주문한다.
따아인지 아아인지 커피를 선택하고 마지막에 몇 층의 어디로 가져다주면 되는지 위치를 입력한다.
33층의 사내 Cafe에서 주문 확인 후 커피를 만들어 로봇에 실어주면
로봇이 알아서 엘리베이터 타고 사무실 문 열고 지정된 자리로 가져다준다.
커피 가격은 한 달 주문치가 누적되어 주문자의 월급에서 차감된다.
팀은 이 서비스를 라스트원마일 배송이라 불렀다.
단순한 시나리오였지만 실제 운영을 하다 보니 운영 전에는 생각치 못했던 예외상황들이 발생했다.
가령 로봇이 중간에 멈추는 경우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엘리베이터에 로봇이 탈 자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커피가 도착했는데도 사람이 찾아가지 않을 땐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많은 주문이 한꺼번에 몰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소한 것들도 사전 입력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이런 자동화 과제는 충분한 품질을 내기 쉽지 않다.
팀원들은 늘 밤늦게까지 남아 고생해 가며 서비스를 고도화했고
덕분에 어느새 버젓한 서비스가 되어 갔다.
잘 알아주지 않는 시범 서비스 뒤에서 고생하는 팀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 매일매일 고생 많습니다.
세상에 로봇으로 잠시 테스트 해보는 회사는 많지만
우리처럼 거의 2년 동안 실제 서비스를 운영해 본 회사는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서비스 운영 경험이 반드시 경쟁력이 될 겁니다.
자부심을 갖고 조금만 더 힘내 봅시다. 늘 고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이건 운영 노하우를 얻기 위한 시범 서비스였지 실제 돈을 버는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달 나가는 로봇 운영 비용을 계속 부담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나는 팀원들과 긴 논의 끝에 서비스 중단을 결정했다.
PoC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이미 얻었으니 이젠 실제 돈 버는 사업 모델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내 서비스를 멈추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임직원들에게 불편하다고 서비스를 계속 해줄 수 없는지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심지어는 나 스스로도 그랬다.
그게 뭐라고...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일 년 넘게 로봇이 가져다주는 커피를 자리에서 받아 마시다 보니
내가 직접 33층 Cafe에 올라가서 커피를 사 오는 게 불편하다 느껴졌다.
다른 방법이 없었을 땐 그다지 수고스럽지 않았는데
더 편한 경험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이제와서 돌아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아마 추가 비용을 내라고 해도 기꺼이 낼 기세였다.
그때, 오래전 SNS에서 봤던 짤막한 포스팅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이 세상에 처음 니와 대세가 되기 시작했을 그 무렵이었다.
"스마트폰 때문에 PC 켜기가 귀찮아졌다."
그래 그런 거였다.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절대가치로 판단하기보다는
과거의 내 행동패턴 대비 상대가치가 어떤가로 판단한다.
내가 더 편해지면 좋은 거고 더 불편해지면 나쁜 것이다. 간단했다.
물론 절대가치라는 건 중요하다.
사라져 버리지 않는 한 그게 언제고 결국 그 가치는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고 버티는 데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든다.
반면, 상대가치가 높으면 고객은 직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상대가치의 '상대'가 누구냐이다.
일반적으로 회사는 늘 '경쟁사'와 비교를 한다.
경쟁 제품대비 어떤 기능이 더 있고, 성능이 얼마큼 더 좋은지...
경쟁 서비스대비 얼마나 더 싸고, 얼마나 더 편한지...
의사결정권자에게 그렇게 보고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고
의사결정권자는 그렇게 보고를 받으니 그걸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어떨까?
고객은 경쟁제품대비 더 좋은 건 그리 중요치 않을 수 있다.
머리로는 알게 되더라도 가슴으로 느낄 수는 없다. 안 써봤기 때문이다.
최선의 경우 그렇게 경쟁사를 이길 수도 있겠지만 고객을 얻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상대가치의 비교대상은 '고객의 관성'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고객이 그 니즈를 어떻게 해결해 왔는지...
현재까지 고객은 무엇에 익숙해져 있는지...
고객의 과거 행동패턴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익숙함을 버린다는 건 엄청난 Cost다.
기꺼이 지불할 만큼 피부로 느껴지는 상대적 가치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직접 느껴진다면 고객은 기꺼이 그 Cost를 감내할 것이다.
그렇게 고객은 행동패턴을 조금씩 바꿔가고, 세상도 따라 조금씩 나아가며
회사도 그렇게 성장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삼성이 루프페이를 인수하여 세상에 처음 선보였을 때
언론에서는 세상이 바뀔 것처럼 대서특필을 했다.
이 기술이 왜 애플페이보다 유리한지 조목조목 보도를 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MST니 NFC니 하는 기술용어들도 알게 되고
갤럭시 고객들은 실제로 써보고 SNS에 사용기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1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플라스틱 카드를 잘 쓴다.
삼성페이도 쓰고 애플페이도 쓰지만 보조적일 뿐이다.
그 와중에서 삼성페이와 애플페이의 차이는
MST와 NFC의 기술적 차이가 아니라 갤럭시와 iPhone의 시장점유율 차이에 더 가깝다.
결국 삼성의 루프페이가 경쟁해야 했던 것은
NFC 방식의 애플페이가 아니라
현금과 플라스틱 카드를 써왔던 고객들의 관성이었다.
삼성의 루프페이가 애플페이보다 더 좋은 상대적 우위도 있었고
그 두 가지 간편 결재가 플라스틱 카드보다 편한 절대가치도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고객의 관성을 이겨낼 만큼 충분한 가치를 주지 못했다.
고객은 그 정도 가치로 스위칭 Cost를 부담하지 않았다.
지난 후 돌아보면 혁신적인 변화일지라도
과정 속에서 변화의 속도는 항상 기대보다 더디다.
어떻게 끝까지 버틸 것인가가 결국 승패를 결정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객의 관성을 이길 수 있는 분명한 상대가치를 주면서 한 발씩 이끌거나
언젠가는 이길 수밖에 없는 절대가치를 만들어 놓고 돈과 시간을 써가며 끝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버티려면
잘 짜인 사업계획보다 더 큰 차원의 믿음과 철학, 돈,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고객의 관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관성을 이기지 못하는 혁신은
나중에 보니 혁신이 아니거나, 혁신이더라도 매우 비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