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와 책임
걷기 시작한 아기 뒤로 엄마가 졸졸 따라간다. 그걸 보고 애 좀 키워본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댄다.
"걷기 시작하면 엄마가 더 힘들지."
우리말을 들은 듯 곁눈질로 미소 짓는 엄마의 마음을 남이 잘도 알아챘다. 엄마들은 다 안다. 아이의 안전한 성장이 우리의 보호와 책임 아래서 가능하다는 것을. 사랑과 모성애로 뒤범벅된 엄마의 하루에 책임이 무겁게 자리한다. 잘 키워야지. 잘 키울 수 있을까?
엄마의 노력 여하와 무관하게 예측하지 못한 상황은 사각지대에 도사리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할아버지를 폭행하고 품 안의 아이를 데리고 갔다는 무서운 일들이 그 당시 주변에 일어났다. 어린이집에서는 순진한 얼굴들을 앞에 두고 무서운 얼굴로 안전교육을 실감 나게 진행했다.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고 아이가 마주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짚었다. 교육을 받고 돌아온 아이가 더듬더듬 배운 내용을 이야기하며 연신 손가락을 교차한다. "안 돼요!" 모르는 사람이 준 간식을 먹으면 안 돼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돼요. 이 세상에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을 가르치는 엄마의 마음에 잡념이 오간다.
어린이집 하원길에 들른 과일집은 사람이 꽤 많았다. 빨갛게 잘 익은 딸기 한 바구니를 들고 계산대에서 지폐와 동전을 헤아리고 있었다. 몸을 뒤로 반쯤 돌려 뒤에 있는 아이를 시야에 담고 있었다 확신했는데, 시야가 점점 환해져 돌아보니 내 아이가 어느 할머니 손을 잡고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아이의 시각에서는 눈높이보다 위에 있는 어른의 얼굴보다는 눈높이에서 보이는 어른의 손이 익숙했다. 손을 잡으라는 사인을 줬을 어른의 손을 의심 없이 엄마 손이라 착각한 아이는 그렇게 따라가고 있던 것이다. 순간 놀라 아이 이름을 꽥 질렀다. 주위의 이목이 집중될 정도의 높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잡은 손과 목소리의 위치가 멀어지고 있음을 육감적으로 느낀 아이가 나를 돌아봤다. 손을 놓고 내쪽으로 다가오는 아이의 눈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놀란 마음에 소리치고 분노한 엄마를 아이는 놀란 눈으로 바라만 봤다. 아이 손을 잠시 잡았던 중년 여인은 쥐도 새도 모르게 유유히 사라졌다.
사고는 찰나의 순간에 발생한다. 찰나는 평생을 두고 곱씹고 후회하며 머릿속 영상을 수없이 돌려보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였다>는 <이다>로 바뀔 수 없다. 이미 있었던 시간을 다시 있도록 되돌리는 강한 힘은 이 세상에 없다. 가버린 시간을 다시 돌아오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실수이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한 것에 그쳐 감사하면서도 기억은 조용히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았다.
아이가 3학년이었던 해, 1학년 짜리 친척동생을 데리고 읍내에 놀러 나갔다는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친정엄마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아이들을 어떻게 둘만 보내요!?"
"저만할 때 다 학교도 혼자 다니고 그러잖냐. 뭘 걱정하냐."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차려놓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내가 나가서 한번 찾아볼까? 넌 밥 먹고 있어라."
내심 불안하셨던 엄마는 자전거를 끌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셨다.
30분 후.
"아직 안 왔니?"
이건 무슨 일이 나도 진작 일어났다. 모든 일에 골든 타임이 있는 법. 나는 지체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나갔다. 마트, 팬시점, 코인노래방... 아이가 평소에 갈만한 곳 위주로 돌고, 가지 않는 곳까지 들러 확인했다. 친정 엄마는 뒤따라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에 아이들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아무렇지 않아 하시던 엄마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마음이 불안하신 모양이다. 목소리엔 다급함과 초조함이 섞여있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할 시점에 대해 판단이 서지 않았고,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아이가 자주 가는 마트에 들러 아이를 본 적 있는지 물었다. 좀 전에 여자 아이 두 명이 나갔다는 말을 듣고 어떠한 힌트도 얻지 못한 채 다시 밖에 섰다. 무심코 건너편 편의점 유리창에 앉은 두 명의 꼬마 아가씨들을 발견했다. 제일 먼저 아이들의 인상착의가 유리창을 통해 내 눈에 들어왔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컵라면 작은 컵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정수리를 부딪히며 면발을 나눠먹고 있었다. 뜨거운 증기로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창에 아이들의 입이 모이는 곳이 흐릿했다. 둘은 완전범죄를 계획하는 듯했다. 평소 라면을 입에도 못 대게 하면 밖에서 저렇게 다 먹고 다닌다고 엄마는 내게 지청구를 늘어놓았다. 라면을 다 먹은 아이들은 삼다수 한 병을 사서 입을 헹구고 삼키기를 여러 번 했다. 냄새를 가렸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흡족한 얼굴로 편의점을 나오다가 할머니와 엄마를 맞닥뜨렸다.
나도, 아이들도, 각자의 이유로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에 웃음만 나왔다. 묻지도 않은 질문에 아이들은 컵라면 사 먹은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둘이 작은 컵하나로 나눠먹었다며 한 사람당 하나씩 먹은 것은 아니라며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 사이 어른들의 분위기가 이상한지 아이들은 곁눈질로 살피기도 했다. 아이들의 쫑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무탈한 일상이 실감이 났다. 무탈한 하루의 감사가 밀려왔다. 집으로 향하는 엄마와 나의 목소리가 그 사이 많이 누그러지고 나직해졌다.
별일 아닌 일에 괜히 나서서 더 큰일이 되어버린 듯했다. 기억이 해석을 거쳐 트라우마로 변질되고, 트라우마는 다시 현실을 왜곡했다. 믿고 집에서 기다렸다면 아무 일 없이 돌아왔을 아이들이다. 어린이집과 학교에서의 정기적 안전 교육의 효과는 몸이 자란 만큼 마음에서도 분별력으로 자랐을 것이다. 아이를 믿는데 세상을 믿지 못한다는 말은 좀 비겁했다. 그저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 밖에 몰랐다고 말하겠다. <였다>가 <이다>로 바뀔 수 있는 방법도 없지만, 단정적으로 <일 것이다>를 남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