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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13. 2024

당연하다는 말

그런 말은 없다.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청쾌한 바람이 여름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임을 알면서 금세 9월을 잊었다. 9월의 늦더위가 당연하지 않았듯 10월의 가을도 당연하지 않다. 도처에 만발하는 상사화와 맥문동과 루엘리아가 고개 높여 하늘을 찬양한다. 자연에 '당연'이란 없고 '감사'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온 평범한 날들도 실은 당연하지 않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끼는 자에게

질병에 항복해 하루하루가 기적인 자에게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당연한 일상은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린 '당연'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을 지속하는가.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는 게 당연하고

가스밸브를 누르면 불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전화 속의 반가운 네 목소리가 당연하고

성의 없는 내 대답이 당연하다.


엄마에게 자신을 잃어버린 육아가 당연하고

가장에겐 N잡과 기저귀값 벌이가 당연하다.

아이가 다니는 학원 개수만큼 나오는 실력이 당연하고

내가 주는 친절에 네가 하는 보답이 당연하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네 생각과 내 세상의 항아리가 넘쳐 '당연'이 흥건하다.  

'당연'은 대관절 어떻게 정의되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당연' 앞에서 불편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가. 

거기서 오는 부당한 감정은 당연한가. 

당연함은 여전히 당연한 것인가. 


내 논리가 맞다고 시작한 대화에 모순이 가득했다. 


그날도 여전히 싱크대에 설거지가 가득했다. 

점심을 혼자 차려먹었을 남편이 먹은 그릇을 그대로 두었다. 

나: 점심을 먹었으면 당연히 설거지를 해 놔야지.

그: 설거지해 놓는 게 당연한 건 아니야. 

나: 그럼 내가 하는 건 당연해? 당연한 건 없는 거야.


'당연'을 요구하며 '당연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 '당연'이 부끄럽다.  

'당연'이 비집고 들기 전에 나를 끌어다 앉혀 감사를 묻는 것으로 마음속에서 '당연'이 퇴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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