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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15. 2024

예의의 적정선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우리 가족은 드물게 세 식구가 함께 저녁 산책을 하는데, 그날은 그 드문 날 중의 하루였다. 식구라곤 세명뿐이지만 시간과 기분을 만장일치로 맞추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집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마트 쪽으로 가다 보면 차가 뜸해 달리는 이들이 장악한 4차선 차도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고압선을 끼고 있는 공원이 나타나는데, 산책 루트를 굳이 정하지 않으면 이 루트가 디폴트다. 대로변 쪽 출구로 나와서 그 앞의 초등학교를 찍고, 다시 홀리데이인 호텔을 찍으면 집으로 갈 수 있는데, 이로써 약 7km의 산책루트가 완성된다. 호기롭게 따라나섰지만 제일 먼저 체력이 바닥난 은유는 발을 질질 끌고 "그만 가자" 랩을 시작한다. 원래대로라면 곧이곧대로 루트를 따랐겠지만 오늘 딸의 표정은 엄살이 아니었다. 모기에 열방이나 물렸다며 벅벅 긁어대는 반바지 차림의 아이를 보며 우리 부부는 한숨 품은 눈빛을 교환했다. 지름길로 들어서 초등학교를 가로질러 바로 호텔 앞으로 거의 다다랐을 무렵,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타날 은유의 반응을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었다. 설마는 역시가 되어 어김없는 손가락은 호텔 로비를 가리키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로비에는 두 대의 다트 기계가 있다. 노는 이가 없어 멀뚱하게 전원만 켜져 불빛을 번쩍이는 다트 기계를 우리가 모르지 않다. 마주한 다트 기계 앞에서 부녀의 승부욕이 팽팽하게 줄다리기한다.

오가는 객들에 시선이 간 건 익숙한 한국어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근처에 오피스 단지가 있다 보니 이곳으로 오는 외국 출장자들이 주로 이 호텔에 묵는 듯했다.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중국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들어선 입구에 한국 직원의 인사가 굽실했다. 악수를 하는 것 같은데 나으리께 연신 읍소라도 하듯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쎼쎼~하는 중국어 인사에도 그 고개를 자꾸 숙여댔다. 상대 중국인도 그의 한국적 제스처에 어쩔 줄 몰라 덩달아 허리를 굽히며 시선 둘 곳을 찾기 바빴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그들의 뒤통수를 향한 계속되는 끄덕거림.


동방예의지국의 그 출장자를 보며 나는 왜 좀 부끄러웠을까.


안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이라는 단편이 떠올랐다. 그의 단편 중 단연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인데, 섬세한 시선과 독특한 문체에 크게 감명하고 웃었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5쪽에 불과한 아주 짧은 단편이다. 허나, 이 글이 주는 울림은 결코 짧지 않다. 대략적인 상황은 이렇다.

회계원 이바 드미트리치 체르바코프가 오페라를 보다 기침을 하는 통에 앞 줄에 앉아있던 장군의 목덜미에 침을 튀기는 실수를 하고 이틀 뒤 관복을 벗지도 않은 채 소파에 누워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
 


생략된 부분에는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장면이 들어있는데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도 예의를 다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예의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받기 싫어하는 예의라면 오히려 무례함만 못한 것이 바로 예의가 아닐까 작가는 질문한다.  


김훈 작가의 <허송세월>의 보석 같은 문장들을 요즘 아껴 읽고 있다. 여기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이가 들면 으레 병원 갈 일이 많아지는데, 간호사들이 하나같이 작가를 아버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버님처럼 생각하고 성심성의껏 모시겠다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 호칭이 달갑지 않은 작가는 그래서 병원에 가기가 싫다. 만일 이 작가가 간호사를 두고 "딸아"하고 부른다면 미친 노인이란 소리가 따라올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3년 전 암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직전에 내가 속한 단체에서 암밍아웃을 했다. 그 후로 받은 엄청난 관심과 기도와 전화가 감사했지만 무겁기도 했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반복했다. 위로의 말을 몰라 웃던 분, 나보다 더 슬퍼하며 울던 분, 별일 아니라며 용기주던 분. 모든 분들의 말투와 내용이 무엇이었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응원의 말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 건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걸 알지만서도 달갑지 않은 위로가 있었다.

"젊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젊어서 치료를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응원이었다. 그러나 병실의 최연소 환자였던 이 삐딱한 환자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돌이켜보면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그거 별거 아니다. 많이들 걸리더라."라고 해준 친구의 대수로운 한 마디가 제일 고맙게 기억된다. )


예의상 하는 말들에 집중해 본다.

내 말이 우선 선을 잘 지키고 있는지 점검해 본다. 모호한 표현에는 적절한 표정을 가미하는지도 체크한다. 상대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내 말이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한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만,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그러함에도 괜찮은 표현을 찾기가 어렵다면 혀보다는 아무래도 귀가 낫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귀는 넘쳐도 되니까 적어도 선은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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