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고 감을 혀끝으로 기억한다. 나에게 3월은 향긋한 냉이, 4월은 알배기 주꾸미, 10월은 탐스런 홍시, 12월은 고소한 방어 철이다. 계속 빈칸으로 남겨두던 9월이 드디어 채워졌다.
9월은 착한 땅콩 철이다.
남들은 아직 잠든 새벽 4시 반, 어제 쌓인 쓰레기를 양손에 조용히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동트기 한 시간 전의 깜깜한 새벽, 공기는 시원하고 청량하다. 쓰레기 분리배출을 마치고 가벼운 손으로 나선 정문 앞에는 아침을 여는 이들로 분주하다. 상설 시장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한 상인들은 단속을 피해 이른 새벽 도로변에서 생업을 이어간다. 시간이 되면 단속반이 올 것임을 예감하여 짐을 다 풀지 않고 디스플레이용으로 몇 가지만 소박하게 꺼내 놓았다. 집에서 기른 채소며 달걀이며 없는 게 없다. 늦깎이 수박과 늪에서 잡았을 참게도 나와있다.
아가씨!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라 의심하며 뒤를 돌아본다. 깊은 주름이 가득한 진갈색 얼굴의 할머니가 관절이 휜 작은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른다.
아가씨 땅콩 좀 사요. 내가 재배해서 캐온거요.
땅콩은 흙도 많이 붙어있지 않고 알도 굵었다. 집에 가서 삶아 먹을 아량으로 1근을 달라고 했다. 무게를 재고 있는 할머니에게 한주먹 더 주세요. 하니 한주먹 더 담고 무게를 잰다. (머니머니해도 인심은 한국 인심이 최고다.) 무심코 1근 반이 된 땅콩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
1) 양푼에 물을 채워10분 정도 담가 흙을 불린다.
2) 박박 문질러 남은 흙을 깨끗이 씻어낸다.
3) 그 사이 냄비에물을 반쯤 채워 불에 올린다.
4) 소금도 밥숟갈로 한 숟갈 넣는다.
5) 물이 끓면 땅콩을 투하하고 기분에 따라 월계수잎을 넣기도 건고추나 팔각을 한 조각 넣기도 한다.
6) 5분 정도 팔팔 끓이다 불을 끄고 뚜껑을 닫아 잔열로 마저 익힌다.
7) 잊어버리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물이 어느새 식어있다. 채에 대고 냄비를 뒤집어 엎는다.
서걱한 정도가 내 입에 딱이다. 앞니로 하나씩 물어 껍데기를 벌려 그 고소한 알맹이를 입에 던져 넣는다.
가을 간식 삶은 땅콩
땅콩 껍데기를 까며 뜬금없는 고민이 시작됐다.
잘 산다는 건 뭘까.
한가위가 가까워져 시장에는 매대마다 열매로 가득하다. 발갛고 반질반질한 얼굴을 내놓고 미인계를 맘껏 뽐내는 자태가 화려하다. 나무에 고고하게 달려 햇살 먹고 해를 닮아간 과일에 눈길이 간다. 탐스럽게 물오른 사과와 석류는 포장지에 곱게 쌓여 값비싼 선물이 되기도 한다.
한여름 밭의 땅콩을 보았다. 땅콩을 본 것이 아니라 실은 땅 위의 땅콩 모종을 보았다. 작은 몸에 동글동글하고 잔잔한 잎이 햇빛을 쉼 없이 흡수하는 중이었다. 땅콩은 여름을 지나며 꼬투리가 형성되고 발달한다. 지리멸렬한 더위 속에서 묵묵히 땅 깊이 심지를 내려 속을 채우는 일에 온정신을 다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이 뿌리 열매는 캘 때까지 그 여문 정도를 알 수가 없다.속을 채운들 자만하지 않고, 남을 볼 수도 없으니 비교도 하지 않는다. 아니, 비교할 생각이랑 하지도 않는다.
땅 속 낮은 곳에서 겸손을, 어둠 깊은 곳에서 인내를.
외양에 대한 욕심도 부러움도 없이 오로지 내면을 가꾸는 일에만 분투했을 땅콩의 삶이 숭고하다.
훗날 그 콩알은 세상에 나와서 그 자체로 맛있는 간식이 되고, 몸에 유익한 기름이 된다. 누구나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땅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