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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

3장. 다시 고향으로

by 천상작가 해원 Jan 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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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6개월 전, 한 대학병원 복도에 심각한 표정이 된 영주의 부모님이 의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권영주 씨 보호자 분이시죠? 아니, 지금까지 도대체 어떻게 버틴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머리가 깨질 정도의 두통을 동반하거나 심지어는 간질과 같은 발작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환자의 머릿속엔 커다란 악성 뇌종양이 자라고 있습니다. 교모세포종이라는 악성 중에 악성 종양인데, 이미 너무 커져서 수술로 대처할 단계를 지난 걸로 보입니다.”     


영무와 영주의 신장 이식 수술이 끝났을 때, 영무의 빠른 회복과는 달리 영주의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영주는 3개월이 다 되어서야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그때부터 생긴 두통이었다. 조금씩 심해지는 고통은 수술 후 6개월이 지나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그동안 수술로 인한 부작용이라고만 여겼던 영주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결국 영주의 한국행이 결정되었고 한국에 돌아온 영주에게 악성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영주 엄마는 병원 복도에 쓰러졌고 영주 아버지는 간신히 그녀를 부축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영주 엄마가 영주 아버지에게 흐느끼며 말했다.     


“여보, 우리 천벌 받는 거 같아요. 너무 많은 사람들한테 몹쓸 짓을 했어요.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엔 피눈물이 난다더니, 저 불쌍한 걸 어떡해요. 생때같은 뱃속의 아이를 지우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가 18년 만에 겨우 한국에 돌아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저는 영주 이대로는 못 보내요. 당신이 살려 놓으세요. 세상에 당신이 하지 못한 일이 어디 있었어요?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 얻었잖아요. 이번에도 여보, 저 아이 꼭 살려야 해요. 다른 모든 걸 포기해서라도 우리 영주는 꼭 살려야 한다고요.”     


무법천지의 지하세계에서 시작해 폭력 조직의 두목, 신문사 사장을 거쳐 국회의원까지 당선된 영주의 아버지,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이루지 못할 게 없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부와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정작 유일한 핏줄인 딸의 병마 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할 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주에게 마지막 희망인 항암치료를 권유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종양이 치료 가능한 단계를 벗어났다는 걸 직감한 영주는 모든 항암과 생물학적 치료를 거부했다. 끝끝내 무슨 치료라도 받아보길 원하는 부모님을 물리치고 영주가 말했다.     


“엄마, 아빠.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내가 건강한 몸으로 영무 오빠한테 신장을 나눠줄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사실 두통이 시작된 건 신장 기증을 결정하기 몇 달 전부터였어요. 두통이 시작될 때면 늘 그렇듯 애드빌(진통제)로 때우고 말았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신장 기증을 결정했을 때가 내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거 같아요. 그때 종양이 발견됐다면 난 살 수 있었겠지. 대신 영무, 그 사람은 죽었을 거야. 그런 걸 보면 죽고 사는 건 정말 하늘의 뜻인 거 같아요. 그러니 제발 그 사람 미워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 몸으로 신장을 떼 줄 생각을 하다니 너도 참~”     


영주의 말을 가로막고 푸념을 늘어놓으려는 영주 엄마의 어깨를 영주 아버지가 가볍게 감싸며 제지했다. 영주의 말이 이어졌다.     


“엄마,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스무 살 시절 그 사람과 사랑을 나누던 때였어요. 나 정말 그 사람 좋아했어요, 사랑했다고요, 그리고 행복했어요. 그리고 내 삶에서 가장 기뻤던 적은 언제였는지 알아요? 내 신장 한쪽을 받은 그 사람이 건강하게 회복한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봤을 때예요. 왜 그런지 기쁨의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지더라고요. 준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더군다나 나의 몸 일부를 떼어내서 누군가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비하고 기적적인 일인지 몰라요. 그런 걸 보면 어떤 게 죽음이고 어떤 게 삶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아빠, 아빠도 그 사람 용서하세요. 아니 아빠가 그 사람에게 용서를 빌어야 해요. 그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를 사랑했다는 것뿐이에요. 만약 아빠가 그때 그 사람 받아줬다면 우리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그 사람도 나 찾아 미국에 와서 꽃다운 청춘 다 날리고 죽음 직전까지 간 사람이라고요. 나는 내가 지운 그 아이에 대한 죗값으로 그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기로 결심했어요. 그걸로 이번 생의 제 빚은 다 갚은 걸로 하고 마음 편히 삶을 마무리하고 싶어요. 아빠, 혹 그 사람이 날 찾아오거든 잘 대해주세요. 이젠 그 사람에게 제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요.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한국으로 돌아와 뇌종양 진단을 받은 지 채 6개월이 되기도 전 영주는 먼 하늘로 떠났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11월의 매서운 바람에 노란 단풍잎이 정처 없이 흩날리던 날이었다.     




법당에 들어서 영주 엄마가 향한 곳은 한쪽 벽면에 마련된 납골당이었다. 수백 개의 납골당 가운데 하나, 작은 쪽문을 열자 영주의 활짝 웃는 영정사진과 함께 “권영주, 1985년생, 2024년 11월에 지다.”라는 문장을 두른 유골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주 엄마는 쓰러지듯 비스듬히 무릎을 꿇고 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딸의 죽음 앞에 그녀는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영주 엄마의 오열이 법당의 모든 색깔과 소리와 향기를 흡수해 버린 듯 영무는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 영무는 움직임이 없었다. 잠시 후, 멈추었던 시간의 굴레어서 벗어난 듯 영무는 나무토막처럼 법당 바닥에 쿵하고 쓰러졌다.      


“여보게, 정신 차려. 왜 이래? 정신 차리라고!”     


영주 아버지가 급하게 영무의 뺨을 두드리며 영무를 깨웠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듯 영무가 일어나 영주의 유골함으로 다가갔다. 탐스럽던 22살의 영주는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작은 유골함에 담겨 있었다. 영무가 흐느껴 우는 사이 영주 아버지가 유골함 옆에 있던 무언가를 꺼내 영무에게 건넸다. 영무와 영주가 헤어질 때와 같은 보랏빛 봉투였다.     


“이건 영주가 자네 오면 꼭 전해 달라고 했던 거네. 우리더러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고 말이야. 자네에게 남긴 마지막 영주의 유품이니 자네가 가져가게. 열어보든 태워 없애든 이제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봉투를 잡은 손을 애써 놓으며 결국 영주의 아버지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이고 불쌍한 것, 영주야 부디 아빠를 용서해라. 미안하다. 미안하다. 영주야, 미안하다!”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 보랏빛 봉투를 쳐다보던 영무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봉투를 열기 시작했다. 봉투 안에는 영주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 한 통과 밴드로 묶인 편지 다발이 있었다. 그리고 한 권의 책, 그 책의 제목은 <티벳 사자의 서>였다. 영주가 쓴 마지막 편지의 글머리에는 49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일생동안 영주가 영무에게 보낸 편지의 통 수를 의미했다. 영무는 영주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49. 사랑하는 영무 오빠,     

오빠를 처음 만난 이후로 지금 편지를 쓰는 이 순간까지 난 한 번도 오빠를 미워하거나 원망해 본 적 없어. 너무 자책하지 마. 만약 오빠마저 내 삶에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마지막을 맞이할 순 없었을 거야.

오빠를 통해 나는 내 몸에 새 생명을 잉태했었고 또 오빠로 인해 내 몸에 있는 생명을 나눠줄 수 있었어. 처음 아이를 지울 땐 죄책감에 너무 괴로웠어.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됐어. 어차피 생명은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명은 멈추어 있는 게 아니라 계속 흐른다는 것을. 그러니 나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지 마. 생명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어. 그 아이의 생명도 그 아이의 것이 아니라 잠깐 나의 몸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였다고. 오빠에게 간 내 신장도 내가 숨 쉬던 하나의 바람과 같은 거야. 너무 부담 가지지 말라는 말이야. 그 바람은 또 오빠를 지나쳐 어딘가로 흘러갈 거니까.     

처음 아이를 지우고 내 마음을 달래준 건 그 어떤 사람도 아니고 내가 봉투에 넣은 이 책이야. 누구나 죽음의 순간에 <티벳 사자의 서>를 단 한 번 들으면, 그 사람은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이 책에 쓰여있어. 그래서 아이를 지운 날부터 49일간 아이를 위해 이 책을 읽어줬어. 그러면서 깨달았지. 죽음을 배워야만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것을.     

오빠가 이 책을 간직하고 자주 읽어보길 바라. 그리고 혹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오빠가 곁에서 지켜줄 수 있다면 <티벳 사자의 서>를 읽어주면 좋겠어. 알다시피 이제 우리 엄마, 아빠에겐 가족이 없잖아. 그래도 오빠가 나의 일부를 가진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그리고 이제 이생에서 오빠에게 남기는 나의 마지막 말이야. 책 357쪽을 펴서 그 안에 내가 남긴 걸 확인하고 내가 줄 쳐 놓은 문장을 새겨서 읽어 봐. 오빠의 삶을 자유롭게 해 줄 비밀이 그 문장에 담겨 있어.    

그럼 안녕,   

사랑하는 나의 영원한 오빠 영무에게, 생의 끝자락에서 영주가!     


영무가 황급하게 357쪽을 열었다. 그 속에는 빛이 바래 희미해진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 남겨져 있었다. 18년 전 병원 뒤뜰에서 영주가 보여줬던 사진이었다. 차마 버리지 못한 사진 아래에는 영주가 펜으로 적어놓은 글자가 남아있었다.     


“주영무 2세, 태명 : 주인공”     


영무는 정신이 조금씩 혼미해짐을 느꼈다. 이윽고 영주가 밑줄 그어 놓은 책 속 문장을 만났을 때, 영무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이것은 ‘듣는 것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다섯 가지 큰 죄를 지은 자들조차도 귀로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대자유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모인 데서 이것을 읽으라. 이것을 전파하라.”     


문장을 읽던 영무의 눈에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점점 동공에 검은 자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무는 정신을 잃고 다시 법당 바닥에 쓰러졌다. 영주의 아버지가 쓰러진 그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지만, 좀 전과 달리 영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영무의 호흡이 약해지고 있었다. 지장전(地藏殿) 법당을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가 영무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여보, 119, 빨리 119 좀 불러 줘요. 이 사람 숨을 안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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