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의라일락 Mar 21. 2024

지금은 경험치 두 배 이벤트 중

어쨌든 고난은 끝난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어떤 특정한 구간을 지나면서 전과는 전혀 다른 설정값의 나로 살아가게 되는 순간. 배우에게는 인생작을 만나는 순간이 그럴 것이며, 부모에게는 아이를 만나고 키워내는 시간, 직장인에게는 어렵고 큰 프로젝트를 맡아 무사히 견뎌낸 시간, 작가에게는 어떤 초고를 위대한 작품으로 키워내는 시간이 아마 그럴 것이다. 그 특별한 시간을 관통하는 동안에 우리는 종종 직감하게 된다. 내 안에서 뭔가가 달라지고 있구나.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 순간이 좋게만 오는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시련이 한 사람이 가진 인생의 결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한다.


나에겐 작년이 그런 시간이었다. 십 년 넘게 스파르타식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만나는 병가의 나날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뒷목 잡는 에피소드들의 무한 증식. 인생에서 절대강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잘 살아간다고 느꼈던 내가 너무나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새벽 네시에 집에 가고 밤새 회의 준비를 해도 멀쩡하던 내가, 한때는 이 구역의 망부석이라고 불리던 내가, 누워만 있어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다고? 코피 나고 맘 상해가면서도 지켜냈던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질 수도 있다고? 착하지는 않지만 나름 법 없이도 바르게 살아온 내가 이런 험한 일들을 겪어야 한다고? 그렇게 나는 혹독한 시련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았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대의학의 힘으로 나는 다시 좀비처럼 부활했고, 최악의 순간을 지나 다행히도 보통을 향해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너무나도 정상이다. 오히려 건강 관련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면서, 지난 몇 년 간의 나보다 훨씬 더 씩씩하고 높은 텐션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부분은 신께 굉장히 감사하고 있다.)


어렵지만 결국 사람을 바꿔놓는 그 순간을, 지칭할 말을 나는 딱히 찾지 못했다. 절망이라 부르기엔 조금 안일한가 싶고, 그렇다고 평정심을 지켰다기엔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으며, 완전히 털어냈다고 말하기엔 주머니 속의 모래처럼 미세한 불안이 여전히 서걱서걱 느껴졌다. 이 힘든 시간을 지나며 많은 성찰을 했고, 그 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려웠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결국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건 잃기만 한 게 아니라 도리어 얻은 게 아닌가 생각하며 살던 바로 그즈음.

 

흘러가는 타임라인에서 그런 말을 주웠다. 너무 힘들 땐 지금이 경험치 두 배 이벤트 중이라고 생각하라는. 그 귀여운 지혜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경험치 두 배 이벤트. 게임에서 특정 스테이지에 나오는 고난의 구간. 난이도는 상당히 어렵지만은 내 캐릭터가 그 미션을 무사히 클리어하게 되면 레벨업과 동시에 보상이 두 배로 쏟아지는.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로서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구간. 힘내라는 말보다 견디라는 말보다 마음에 더 와닿는 말이었다. 그래 이 판만 깨면 나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어쨌든 중도포기 하지 않고 이 시간을 견뎌봐야 하겠구나.


사실은 도저히 깰 수 없을 것만 같은 판이다. 온갖 허들을 넘어 겨우 다 온 줄만 알았는데, 새로운 못과 바나나와 빌런들이 쏟아지는 판. 여기서 떨어지면 그대로 FAILED가 뜰 것 같은 판이다. 남들처럼 크게 성공하지도, 그렇다고 HP와 MP가 하늘을 찌르지도 못했던 삶. 치트키 하나 없이 소소하게 지금까지의 스테이지를 달려온 나에게, 지금, 경험치 두 배 이벤트가 열린 것이다. 집중하세요. 이번 판은 조금 힘든데요, 어쨌든 당신이 건너가야 하는 판이니까요. 두 눈을 크게 뜨고 감각을 전부 열어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흡수하세요. 집중해서 장애물을 건너세요. 보스몹을 물리치세요. 호오, 제법이군요. 이제 부스터가 작동됩니다. 체감할 수 없던 스피드죠. 당신은 빠르게 이 구간을 빠져나갈 겁니다. 이제, 즐거움과 설렘으로 가득 찬 스테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얻게 되는 것들은 온전히 다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거예요. 지금부터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 예고편 속, 마지막 거센 비가 개고 난 후, 그다음에 펼쳐진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몇 가지 이견이 있겠지만, 나는 그 어두운 터널 끝의 엔딩을 해피엔딩이라 해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모든 건 해석의 차이야.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맘대로 생각한다. 경험치 두 배 이벤트는 계속되고 있구나. 예고편 속 눈부신 햇살 속을 달리는 주인공들처럼,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살게 된 나는 오늘도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보물이 쏟아지려고. 대체 얼마나 나를 더 강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건가. 이 스테이지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나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꽤 난이도 있는 길이었어. 그래도 결국엔, 잘 건너왔구나라고. 정말이지 고생 많았다고.


살아가자. 그날이 올 때까지.

매일 즐겁게 인생을,

되도록이면 좋은 쪽으로 해석하면서.



PS.

이번 판은 너무 힘들었으니까, 다음 스테이지는 부디 완만한 꽃길이길 희망하며. 저처럼 또 다른 경험치 2배 이벤트 구간을 건너고 있는 모든 인류를 응원하며, 지금부터 매주 목요일 꽤나 희망적인 브런치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한 주간 모두 건강하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