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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Jul 10. 2024

나는 강철 로봇이 아니다

요즘 복숭아가 맛있다. 말랑하고 노란 복숭아 껍질을 벗긴다. 칼로 먹기 좋게 자르니 단물이 줄줄 떨어진다. 한 박스를 사서 며칠 새 다 먹었다. 그 달달한 복숭아를 싱크대에 서서 자르고 있었다. 복실이가 막 학교에서 온 참이었다.


뒤돌아 서 있는 엄마를 뒤에 와서 꼭 안아준다. 백허그의 기쁨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아 이것이 행복이야~~ 그래야 정상일까? 국물이 뚝뚝 흐르는 두 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처참한 모습으로 일그러진 딱딱한 씨앗을 품은 복숭아 알맹이를 들고 있다. 더위를 한가득 안고 들어온 아이가 내심 귀찮다.


‘떨어져라. 제발.’


“쫌! “


아이는 팽 토라져서 금세 얼굴이 벌게지더니 눈물을 글썽인다. 얼른 손을 씻고 안아 줄 것을 그랬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잠시 아이를 안아줄 여유가 없었을까.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 되었을 것을.



아침에도 늦었다고 잔소리를 듣고, 오빠들에게는 매일 맞고 자신은 샌드백이냐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간식 준비를 멈추지는 못하고 잠시 몸을 돌려 아이에게 안아달라고 했다. 의자에서 쭈뼛거리며 일어나 엄마를 꼭 안아준다. 그러곤 금방 얼굴이 밝아지며 뭐라 재잘재잘 떠든다.



요 이쁜 녀석을 두고 밥을 하며 간식을 챙기며 청소와 정리를 하며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댄다. 잠시 안아줄 여유가 없을까. 나는 늘 아이에게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바쁜 와중에도 잠시 안아주고 이야기 들어줄 수 있는 엄마가 되면 좋겠다. 그래 엄마가 되면 좋겠다. 나는 주부이면서 엄마이지 않던가.


큰아이 복동이 어릴 적, 엄마가 주방에 서 있을 때면 아이는 엄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밥 한 끼에 온 집안 그릇과 냄비와 주방 도구가 싱크대 위를 점령하던 때였다. 주방이 늘 한가득인데 손은 또 얼마나 느려 터졌었던가. 혼자 노는 아이를 위해 중앙 싱크대를 다 비웠다. 엄마가 뒤돌아서 설거지를 하면 싱크대에 들어가 앉아 노는 게 일이었다. 그런 아이가 지금은 훌쩍 커 중 3이 되었다. 이제는 주방 싱크대에 들어갈 일도 엄마는 찾는 일도 드물다. 참 빨리도 큰다. 주부는 그렇게 엄마 노릇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땐 복동이 하나였다. 살림살이도 얼마 없었다. 일도 안 했다. 그리고 젊었다.


아~~ 나이도 많이 들었구나! 그래서 더 힘든가? 순전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은 커가고 엄마는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막내 복실이도 복동이처럼 빨리 커버린다고 생각하니 엄마 마음이 바쁘다. 어쩌냐. 달복이, 복실이에게는 주방에 빈 싱크대 놀이공간도 못 만들어 줬었는데... 늘 일한다고 아이들 학교 다녀오면 한 번 안아 줄 여유가 없으니 어쩌냐. 백허그를 해주는데 소리나 빽 지르는 못돼 빠진 엄마라니. 엄마 노릇도 꽝이다.


주부란 살림을 꾸려나가는 주체다. 먹는 것, 빨래, 청소 등 집안 단속 하는 게 주부의 일이다. 불량 주부란 엉망진창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사람이다. 딱 나인데? 하지만 불량에서 탈출하려니 좀 억울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살림만 사는 게 아닌데. 엄밀히 말하면 주부라는 역할은 여러 가지 중 하나에 불과한데 살림 그것 하나 못한다고 낙인을 찍어 놓고 내내 괴로움에 나를 옭아매었다.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살 수는 없다. 좀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도 있어야 숨을 쉬고 살지.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나, 둘 쯤 못해도 괜찮다. 그래,


못해도 괜찮아.


매번 라면 탓이나 하고 가공 식품 탓이나 하고, 상황 탓을 해봐야 답이 안 나온다. 내가 여러 명이 아닌데 여러 역할을 한꺼번에 해야 하니 과부하가 걸릴 밖에. 당연한 이치다. 순리대로 가자. 나는 주부이고, 엄마이고, 일하는 노동자이고, 자기 계발자이기도 하다. ‘나’라는 이름 속에 이렇게 많은 역할이 들어있다. 나는 하나뿐인데.


나는 강철 로봇이 아니다. 하물며 로봇도 기름칠을 하고 배터리 충전을 하며 쉬는데. 나는 오직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다.


오직 하나뿐인 그대

못해도 괜찮아요.
쉬엄쉬엄 가요.
잘하려고 하지 말아요.
자신을 다그치지 말아요.
누가 떠미는 것이 아닌데
재촉하는 건
그대 자신인지도 몰라요.

가끔
일탈도 괜찮아요.
가끔 나쁜 음식도 괜찮아요.
기분 좋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 나가면 됩니다.

나는 강철 로봇이 아닙니다.

나는 나이기에
나 하나만으로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나는 좋은 엄마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오늘의 야심작. 오늘 아침 남편과 커피 타임 대신 컵라면 타임을 가졌다. 어제 복이가 6개입 박스로 사다 놓은 작은 새우탕이다. 모든 라면을 즐기지 않지만 그래도 선택을 하라면 집어드는 새우탕 미니컵. 라면을 너무 참았더니 금단증상이 나타난다. 전날 마트에서 눈에 밟히는 것을 못 사고 나왔다. 복이 배고프다는 소리에 얼른 가 사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아침 출근 후 귀신같이 라면을 찾아내 먹자고 하는 남편. 같이 먹으니 맛있다. 국물까지 호로록 다 마셨다. 역시 일탈은 최고의 맛이다. 마음이 콕콕 찔려 방울토마토를 챙겨 먹었다.


6개입 새우탕. 6인 가족이 하나씩 딱이다. 저녁엔 복실이와 달복이도 신나게 컵라면을 먹었다. 이렇게 즐거울 수가! 나는 정말 아이들을 신나게 해주는 엄마다. 오늘은 불량 주부, 그러나 최고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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