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실이가 드러누운 그날이었다. 화가 났을 때 깨어나 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화신. 녀석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찰나의 시간을 지나 또 목구멍이 괴성을 질렀다. 화신을 바라보는 내면의 눈동자가 눈을 깜빡이는 소리와 바깥으로 터져나가려 아우성치는 거대한 외침이 한데 뒤섞인 순간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평소와 달리 그날은 내 사고가 정지되며 분출, 정지, 폭발의 과정을 거쳤다. 나는 당황해서 멈추었고 고민했다. ‘멈출까 말까. 외칠까 말까.’ 정지된 짧은 순간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혹은 화신을 마주하고 움찔 놀랐던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화수집 며칠 만에 타인이 아닌 나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화나는 순간은 반복 재생된다. 화가 치밀 때 반복 재생을 멈추기 위해 혼자서 때로는 아이들이 있을 때도 장난 삼아 외쳤다. “시파이어. 에미럴드, 사금파리 같은!” 보통 설거지를 할 때면 나의 안하무인 태도는 사라지고 고결한 사람인양 가면을 쓴 후 상대방의 서운한 말, 행동에 원망을 뒤섞어 영화를 만들었다. 상영하고 재상영하고 반복해서 틀었다. 머릿속에 재생산되는 타인에 대한 서운한 행동들, 내 마음에 차지 못한 것, 아픈 말들이 나를 반복해서 쑤셨다. 그럴 때면 수돗물을 크게 틀어두고 또 외쳤다. “시파이어. 에미럴드, 사금파리 같은!”
타인의 행동만이 재생되던 화면에 내가 나타난 것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 내 속의 화를 근본적으로 파헤쳐볼 수 있는 기회. 이건 화수집의 효과인가? 화를 몇 개 수집하고 ‘이렇게 저렇게 잘 풀렸습니다’가 결말이 될 줄 알았는데 의외의 전개에 당황스럽다.
내가 진실로 나를 마주한다. 남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남 탓을 많이 했다. 내 화는 내 것이었다.
타인에게 욕을 하며 남에게 민낯을 드러내는 것보다 내 깊숙한 내면을 홀로 들여다보는 것은 더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다. 곱씹어보며 화신을 다시 마주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이제야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