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복실이는 3층 미술 학원에 다닌다. 엄마의 계단 운동을 돕는 착한 딸. 엄마가 숨차게 3층 계단을 올라가면 복실이는 엄마와 손을 잡고 같이 계단을 밟아내려 온다.
내려오는 길 복실이의 왼손이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손이 말랑하다. 작은 손이 언제 이렇게 커졌는지. 한 손은 계단 난간을 붙잡고 간다. 붙잡고 가는 줄로만 알았다. 오른손을 난간에 걸치고 주르르르 손썰매를 타며 계단을 내려온다. 키 작은 아이의 겨울 옷 긴 소매가 다 닿는다. 소매 부분이 같이 썰매를 탄다. 소매 끝이 까맣다.
화르륵 정지!
빨면 되는 것을. 그래 매일 빨아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
까만 옷이 유독 많았던 아들 셋. 빨래를 널어놓으면 우중충하니 늘 기분이 꾸물꾸물했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며 흰옷, 연분홍옷, 핫핑크, 연노랑, 연보라, 아이보리, 민트 색 등 다양한 밝은 봄햇살이 우리 집 건조대에도 찾아왔다. 윗옷뿐 아니라 바지도 연핑크, 아이보리, 연보라... 아이는 밝다. 아주 밝다. 보는 것은 좋으나 보기에만 좋다.
썰매를 타던 그날 복실이는 아이보리로 무장을 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뭘 먹는지 식단표를 챙겨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가슴에 음식을 새겨온다. 빨간 국물, 노랑 국물, 갈색 국물 다양하게도 묻혀온다. 미술학원에서는 소매에 알록달록 물감을 묻혀온다. 예쁘다.
놀이터에서 놀 때면 흰 바지든, 연보라 바지든 신경을 안 쓴다. 그저 미끄럼틀에서 내려오기 바쁘고 흙바닥에서 놀기 바쁘다. 그래그래 세탁기가 빨아주니 괜찮다. 괜찮다.
여아 가방은 왜 반짝반짝 희끄무레한 색깔인지 까만 때가 묻는다. 까만 가방에도 묻었겠지 여자아이 가방이라고 더 묻어올까. 그동안 세탁에 무심했던 아들들의 가방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복실이는 바지에 그림을 그린 전력도 있다. 손에 크레파스를 막 잡던 무렵 유성 네임펜으로 자신의 바지 무릎에 그림을 그렸다. 참 잘 그려서 다른 한쪽도 똑 같이 그려 어린이집에도 입고 다녔다. 어릴 적 추억 때문일까 옷에 유독 그림을 잘 그려온다. 가슴도 소매도 엉덩이에도 그려온 작품들을 모두 환영한다. 장래에 대단한 화가가 되려고 그러나 보다.
그려 오빠처럼 이마에 그리는 것보다는 낫다. (달복이가 그랬다.) 그려 오빠처럼 색깔별로 블록을 입에 넣고 귀에 넣고 코에 넣는 것보다는 낫다. (달복이가 그랬다.) 그려 오빠처럼 크레파스를 토옥토옥 분질러 먹는 것보다는 낫다. 그려 오빠처럼 색연필을 색깔별로 맛보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 (복이가 그랬다.)
며칠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이의 행동을 가만히 관찰해 봤다. 가관이다. 우선 계단 손잡이를 잡기 전 소매를 털어 손을 옷 안으로 넣는다. 손을 안으로 감추고 소매로 밀며 내려온다. 똑똑한 녀석이다. 깨끗한 손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 뛰어나다. 1층까지 다 내려오면 다시 한번 소매를 흔들어 털고 손을 꺼낸다. 감쪽같다. 며칠의 관찰로 아주 자연스러운 썰매 타기 현장을 목격했다. 맙소사! 매일 빨아야 하는 거였나?
셋째 달복이는 ‘나 홀로 집에’ 영화를 좋아한다. 형들이 고르는 영화는 늘 제 취향과 맞지 않는다. 슬쩍 방에 들어가 혼자 즐기는 영화다. 껄껄 웃으며 빠져있는 아이 뒤에서 케빈이 썰매 타는 장면을 봤다. 2층에 계단에 눈썰매를 가지고 올라가 1층까지 그리고 현관문을 통과해 마당까지 신나게 달렸다. 그려 우리 복실이는 케빈이 보다 많이 양호하다.
빨면 된다. 천천히 빨기로 하자. 세탁기 앞에 모셔만 두자. 앞으로 외투는 깜장으로 입혀야겠다.
흰 빨래 세탁은 손이 많이 간다. 애벌빨래를 항상 해줘야 해서 미뤄두기 십상이다. 그래서 찌든 때 제거를 위해 바르는 타입의 세제를 애용한다. 손으로 문대는 수고 없이 바르고 세탁기에 휙 넣어버린다. 빨아서 없어지면 고맙고 안 없어지면 할 수 없다. 세상사 편하게 좀 살자.
그동안 까만 옷 회색옷 구리구리한 옷만 입는다며 투정 부려 미안하다 아들들아. 이제는 투정 부리지 않겠다. 하양으로 넘어가지 말아 주면 좋겠다. 회색을 거쳐 하양으로 넘어가니 대충 난감하단다. 초등 저학년 때 알록이 달록이 옷을 입던 꼬마들은 초등 고학년이 되면 깜장 단체복을 입는다. 중학생이 되더니 교복 위에 회색 후드집업을 맞춰서 입었다. 이제 중3이 된 아이는 평생 안 입던 흰색 티만 입고 다닌다. 밝으니 좋긴 좋다. 얼굴이 하얘 보인다. 훤하다. 교문을 나서는 순간 교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흰 반팔만 입고 다닌다. 제발! 그거 속옷 같다고.
깜장에 하양 땟자국을 만들어 오는 신기한 능력자 둘째 복이는 중1이다. 현빈이를 닮은 잘생긴 얼굴이나 턱에 큰 구멍이 있어 무엇이든 먹으면 질질 흘린다. 꼬마들이 흘리면 화가 나지만 요 녀석이 흘리면 아무렇지 않다. 그러려니 하고 마음을 내려놓은 지 오래다. 참 편하다. 그 대신 정리의 달인으로 교육시키고 있다. 겨울 패딩 잠바를 무려 턱받침으로 사용하는 복이. 근래 들어 까만 패딩에 묻은 하얀 얼룩이 보기 싫었는지 자주 빨래를 요구했다. 관심 없던 땟자국도 눈에 들어오는 사춘기 소년 요즘 회색 잠바를 입고 다닌다. 무려 회색 항공잠바. 아저씨 같다. 색깔을 잘못 고른 엄마가 미안하다.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한다. 내가 한다고 착각하지 말자. 세탁기로 옮기는 작은 수고로움을 피하기 위해 아이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소매 찌든 때를 조금은 줄여볼 심산으로 계단을 내려올 때 위치를 바꿔 벽 쪽에 서게 했다. 썰매를 안 타서 그런가 발장난을 하거나 자주 멈춰 장난을 친다. 아이와 장난질 대꾸를 해주며 내려가는 길이 참 멀다. 빠르게 내려오려면 썰매가 최고다. 선택은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