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드라마가 된다. 부러 화를 불러내지 않아도 기승전결의 짜인 스토리에 따라 정점의 순간이 불쑥 튀어나온다.
막내 복실이가 드러누웠다. 감긴 눈으로 밥을 먹다 말고 드러누웠다. 아이는 늘 잠이 모자라다. 안다. 그래서 밤에 씻지도 못하고 눈에 잠이 가득인 아이를 그냥 재웠다. 그런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는가. 사랑으로 어르고 달래 부축하고 (이제는 안아 들지 못한다) 나와 밥상 앞에는 어찌어찌 앉았다. 밥을 몇 번 떠먹이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안 씻는단다. 기상부터 정성을 안 들였으면 화가 덜 났을까. 온갖 예쁜 목소리를 다 쥐어짜 공주처럼 모시고 거실까지 나왔는데 아이는 엄마의 정성은 싹 무시하고 그저 잠을 놓기가 힘들다. ‘이 정도 했으면 너도 알아서 좀 따라와라.’하는 엄마의 마음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이웃님의 말씀이 양쪽 귀에서 들린다. 그러나 주면 바라는 게 사람 심리인가 보다.
평소 막내 딸아이라고 예뻐만 해 준 것이 잘못일까. 공주님 대접을 해주었으니 공주로서 권위를 지켜라, 공주님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양육 태도가 문제일까. 아이는 돌변한 엄마의 목소리가 영 불만이다. 애초에 일찍 자면 해결되는 문제인 것을. 밤에 씻고만 잤더라도 해결되는 문제인 것을. 그러나 눈이 감긴 아이를 깨워서 씻길 수도 없고 일이 늦게 끝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계속 시간을 확인하던 엄마의 화가 폭발해 버렸다. 며칠 잠잠하던 화신이 깨어났다. 화르륵! 파이어! 폭발! 분출! 파이어! 폭발! 분출! 터져 나오는 화를 어쩌지 못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많기도 하다.
드러누운 아이, 무거운 아이를 이고 지고 들고 갈 수 없고, 떡진 머리를 안 감을 수 없고, 정해진 등교시간을 어길 수 없다. 아빠가 태워줄 수도 없다. 아침밥만은 완벽하군. 세 술 정도면 아주 양호하다.
엄마가 화를 내니 복실이는 그런다.
”엄마는 막 소리치고, 미워! 평일이 너무 싫어.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
‘너만 늦게 준비하잖아. 안 씻는다 하고 드러누웠잖아. 너만 미워하는 게 아니라 엄마 원래 말투야. 너만 평소에 특별하게 코맹맹이 소리로 바꿔서 말해주는 거거든?‘
빠르게 무엇을 제외할 것인지 파악해야 하고, 제외시킨 것의 뒤처리도 처리해야 하지만 근래 들어 가장 대단한 폭발이라 엄마는 감정을 어쩌지 못했다.
커다란 분출은 따라오는 작은 분출에 면죄부를 준다. 한 마디씩 하는 가족들에게 일대일로 조준 사격을 거하게 해 준다. 왕년 스나이퍼 솜씨인가 백발백중 명사수다. 꽥 소리를 지르면 누구든 입을 꾹 다문다. 소리를 지르다 지르다 힘이 빠져서 그런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시간을 내려놓은 듯 소파에 가 허탈하게 앉았다.
가족 모두가 긴장이다. 학교에 늦을까 봐 걱정 어린 눈으로 오빠들 셋은 슬금슬금 준비 중이다. 복실이만 천하태평이다.
달복이를 어찌 좀 낑겨 태울 수 없느냐 물었다. 아빠는 못 태워준다. 먼저 큰아이 둘을 태우고 나가는 아빠 차에 셋째 달복이도 태우면 좋겠지만 아빠 차는 3인용 트럭이다. 냉정한 아빠 친절하게 방도를 알려준다. 태울 수는 있지만 걸리면 벌금이 크단다. 엄마 차로 아이 셋을 태워주고 다시 돌아온단다. 그럼 40분이 걸린다. 복실이도 늦을 수는 없는 상황. 그 시간이라는 게 뭔지. 냉정하게 방법을 알려주는 남편이 밉다. 아주 깔끔한 성격이다.
씻어야 간다. 겨울에는 털모자라도 쓰고 나가면 되는데 떡진 머리를 가릴 방도가 없다. 늦어도 씻어야 한다. 안 씻으면 못 나간다. 그러나 아이는 요지부동이다.
셋째와 넷째 둘 다 늦을 수 없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시 아이에게 매달려 본다. 아주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씻으면 못 가! “
”치카만 하고 가면 안 돼? “
”안돼! “
최대한 빨리 씻고 최대한 더 늦지 않게 가야 한다. 목표를 정하고 나선 장애물은 모두 제거다. 빠르게 씻기고 복실이의 목과 발에 옷을 끼웠다. 아빠차가 형들을 싣고 먼저 중학교로 출발하면서 거실에 혼자 남아있던 달복이는 가방까지 메고 완전 무장을 한 채 서있다. 마음이 급한 아이에게 복실이 머리를 부탁했다. 평소라면 집안 뒷정리를 하는 엄마를 대신해 큰 형아들이 해 주는데 처음으로 복실이의 긴 머리를 맡았다. 빠른 등교를 위해 아이는 군말 없이 여동생의 긴 머리를 데리고 가 머리에 소리를 쏘인다. 엄마가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소리가 우렁차다. 잘해주고 있겠지? 웬걸 적외선 불빛을 쏘는지 멀리서 조준을 하고 있다. 자세가 제대로다. 대충 말리고 출발!
이제 남은 문제는 지각. 지각 시 전화를 달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난감하다. 운전을 해야 하는데.. 지난해 까지는 큰아이가 조수석에 타고 다녀서 연락처를 찾아 문자를 부탁했는데 없으니 아쉽다. 조수가 절실한 순간이다. 어쩐다. 정지해서 연락처를 찾아보았지만 없다. 전화번호를 미리 저장해 둘 것을. 앱에 저장된 교실 번호로 문자를 보내고 다시 출발한다.
차를 달리는데 달복이가 뭔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답을 원했다. 그 사이 호랑이 엄마는 잊은 것인가. 아이의 적응력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호응해 주지 못했다. 운전이 급하다며 조용히 가자고 했다. 엄마가 빠르게 쌩쌩 집중해야 해서 미안하다 아들아. 가라앉지 않은 화는 아이의 말도 가로막았다.
9시 5분, 아이들을 교문에 골인시켰다. 아침이 참 길기도 하다. 한숨을 몰아 쉬며 출근하는 차 안, 홀로 내 안의 화신을 마주했다. 나는 사실 신이 아니었을까? 화신. 잠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너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