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달리다

by 눈항아리

묵직한 하늘은 남색이다. 빛줄기 하나 내려주지 않고 낮고 평평하게 아침 하늘에 평상을 깔았다. 시험 이틀째를 맞는 아이에게 퍽이나 어울리는 하늘이다. 제발 방방 뛰지 말고 덜렁거리지 말고 차분하게 알았지? 아이들을 안전하게 학교에 내려주고 신나게 달린다. 가게를 지나치고 평소 다니던 익숙한 길을 벗어나 강을 건너고 짧은 지하도를 지나 강둑 아래 서쪽을 향해 뻗은 도로를 달리다 남으로 방향을 꺾었다.


홀로 맞이하는 드라이브. 그 길의 하이라이트는 자칭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다. 왕복 4차선 도로 양쪽으로 주욱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가 나를 맞아준다. 우람한 허리둘레, 하늘로 쭉쭉 뻗은 가지 사이로 무수히 매달려 흔들거리는 넙데데한 나뭇잎. 마음은 초록 잎 흔드는 가을바람 타고 산으로 가잔다.


울창한 플라타너스 나무는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한다. 학교 가는 길 큰 다리 건너 파출소 앞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있었다. 지금은 익숙한 거대한 이파리지만 잎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나무 아래로 무수히 떨어지는 쐐기벌레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어느 해는 유난히 쐐기가 많아 나무 근처에선 발을 디딜 틈조차 없었고 다리를 건너면서도 벌레가 없는 곳을 골라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조심 튀어 다녔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면 돗자리를 펴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도 플라타너스였다. 중학교 때엔 테니스장 옆에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하나 있었는데 얼마나 컸는지 나무의 뚱뚱했던 허리의 굵기가 생생하다.


다리 건너 파출소 앞에도 학교에도 이제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없다. 그 흔하던 가로수도 다양한 수종으로 바뀌었다. 벌레나 후드득 떨어지던 그 나무가 왜 은근한 추억으로 남았을까. 살면서 본 가장 친숙하고도 큰 나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쐐기벌레의 기억도 어린 시절 추억이랍시고 꼬깃꼬깃 구겨진 기억의 작은 조각을 어느 한편에 저장해 두었나 보다.


소환 실력을 뽐내며 신나게 달리는데 앞을 가로막는 트럭, 트럭이 아니고 레커. 레커가 주황불을 번쩍이며 흰색 트럭을 느릿느릿 끌고 간다. 오른쪽으로 차선변경을 할까? 그쪽은 더욱 느릿느릿한 사발이가 막아섰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 내외가 앞뒤로 나란히 앉아 드라이브 중이다. 가을의 정취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평소 느릿한 차들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나 이 길에서만은 평온한 여유를 즐긴다.


이 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평소 다니지 않는 가끔 오는 길이지만 익숙해서 그렇다. 초보 운전자에게 우후죽순 생긴 회전교차로는 공포와 같다. 시내 회전교차로는 진입하기 싫어 일부러 빙 둘러 간다. 그러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끝에 있는 두 개의 회전교차로는 아주 익숙하다. 매번 같은 규칙으로, 오른쪽 차선을 이용하여 오른쪽으로만 간다. 그러기 위해선 회전교차로 진입 한참 전에 1차선에서 2차선으로 차선 변경을 해야 한다. 대개 차선 변경 지점도 비슷하다. 앞을 막고 천천히 가는 두 대의 차량 덕분에 수월하게 차선 변경을 하고 회전교차로의 곡선을 즐긴다. 연이어 있는 회전교차로도 베스트 드라이버의 솜씨로 통과한다. 회전교차로에서 머뭇거리는 차들을 보며 우월감도 느낀다. 나는 베테랑이다! 익숙한 길에선 초보 운전자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돌아가더라도 아는 길로만 간다. 아이들은 엄마의 운전이 늘 답답하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길은 두렵다. 모르는 길,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데 새로운 길은 피해 다니는 게 상책이다.


새로 심었던가, 잘라내서 머리숱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관리된 플라타너스가 마지막 길을 함께해 준다. 길은 농산물도매센터로 이어진다. 과일 사러 간다. 달콤한 풍요로움을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은 또 다른 익숙한 루트다. 역시나 그 길에서도 차선변경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한다. 그냥 천천히 오른쪽 차선만 타고 올 수도 있는 길이다. 돌아오는 이 길에는 더 커다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었는데 올해 어느 봄날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 양쪽 거대한 플라타너스를 모두 뽑아버리고 아담한 배롱나무를 심어놨다. 뿌리 뽑기도 쉽지 않았을텐데그 멋진 것을 왜 뽑았을까. 이유가 있겠지만 아쉽고 아쉽다. 플라타너스는 쑥쑥 자라니 머리 다듬어주기 귀찮았나? 찬 바람에도 진분홍 꽃잎 매단 배롱나무 꽃무리를 감상하며 그자리에 있던 플라타너스도 그리워하며 오늘의 출근길을 마친다.


아침의 여유, 가끔 나홀로 드라이브는 좋다. 과일을 사러 다녀온 길이지만, 평소보다 아침 일이 늦어졌지만 그래도 좋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을 달려 왔다.


이제 10킬로그램 박스를 들어 나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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