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하기와 투쟁하며, 밥 안 먹는 아장아장 아기들과 신경전을 벌이며 보낸 심신 고단한 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힘든 와중에도 나는 부지런히 다른 할 일을 찾아냈다. 집에서 하는 일이래야 별 것이 아니다. 돈도 안 되는 취미 같은 것(?)이었다. 늘 체력의 한계가 올 때까지 밤잠을 줄여가며 무언가를 했다. 바느질이 그랬고, 꽃 만들기가 그랬다. 아이들 엄마표 육아는 덤이었다. 힘들면 쉴 것이지 왜 나는 쉬지 않았을까?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파우치를 만들었다. 아직도 못 다 만든 천과 부자재들이 대형 투명 정리함에 두세 바구니 있다. 절대 취미 따위가 아니었다. 전투적으로 임했다. 바느질을 열심히 해 손가락에 바늘구멍투성이었고 눈이 침침해졌다. 격자무늬 퀼팅이 나의 주 무기였다. 생각해 보면 그건 마음 수련에도 큰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걸려 내 손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했다. 파우치 만들기는 성취감이 컸다. 완성된 내 노력의 시간들을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인데, 결혼한 다음 해부터 꽃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지, 주름지, 습자지, 펠트지, 천 등 매년 다른 종류의 꽃을 만들었다. 꽃바구니를 꾸미기 위한 도움 꽃으로 흰색, 핑크, 살구색 등 색깔 별로 준비했고 다른 여러 종류의 꽃을 만들어 적절히 섞었다. 5월은 나름 중요했던 가정의 달. 3월부터 재료를 주문해 골방에 넣어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만들었다. 나는 만들기를 꽤나 좋아했나 보다.
우리 때 엄마표 육아는 꽤나 인기였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어 이것 역시 인터넷을 보고 나름 독학하여 정보를 얻었다. 교육자료 색깔 프린트, 엄마표 손코팅, 자석 스티커 만들기, 각종 팽이 만들기, 방바닥을 도로로 만들고, 거실에 거미줄을 만들고, 스파이더맨이 잡고 내려오는 집라인을 만들고, 에이포만한 숫자 스티커를 계단에 옆에 주르륵 붙이고 영어노래와 유아 노래를 원음 그대로 불러줬으며 잠자리 독서를 실천하는 엄마표 육아의 대표주자였다. 겨울이면 아기욕조에 눈을 가득 퍼 담아와 욕실에서 아기들 눈놀이를 시켜줬다. 스파게티, 국수를 삶아 던지기도 하고 요리놀이를 했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서 만들어오는 만들기는 하원 후 뚝딱 엄마의 손에서 바로 만들어져 첫째와 둘째가 같이 가지고 놀았다. 나는 정말 만들기에 소질이 있나 보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육아하며 처음 접해본 레고는 정말 재미있어서 아이들과 같이 하루 종일 만들고 놀았다. 우리의 최고 작품은 티라노 사우루스와 소방차였다. 종이접기는 둘째가 좋아했다. 종이접기 책만 열 권이 넘는다. 우리는 같이 종이접기를 했고 벼룩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종이접기 책들은 너덜너덜하다. 어찌 보면 엄마표 육아를 할 때 나는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고 많이 행복했다. 내가 정말 이런 걸 좋아하는 줄 몰랐다. 좋아하지 않고서야 이런 만들기와 아기 돌보기를 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김치를 해 먹으려고 노력했고 김장을 했다. (역시나) 인터넷표 레시피를 뽑아 파일에 철을 해놓고 잔칫상 차리기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김장을 했다. 나는 왜 김장을 하려고 용을 썼을까. 못 말리는 극성 주부여서 그랬다. 사 먹는 김치가 영 못마땅했다. 비쌌다. 조금 들어 있으니 맘껏 먹지 못했다. (나는 음식 욕심이 과한 사람이다) 김치찌개, 볶음을 해 먹을 수가 있나. (나 손도 크구나) 들어가는 양념도 신뢰할 수 없다. (좀 믿고 먹을 것이지) 절인 배추를 시켜다 김장을 해봤더니 배추절임 정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펄펄 살아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배추를 잘 절이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배추를 절이는 게 어렵지만 그것만 마스터하면 배추김치, 김장김치를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상한 자신감이었다. 망한 김치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당시에는 김치를 만들어 망하는 이유를 다각도로 분석해 보는 중이었다.
그중 딱 걸린 것이 소금이었다. 어느 날 배추를 절여 김치를 해놨더니 쓴맛이 났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만만한 소금부터 캐보는 것이다. 좋은 소금을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간수를 빼 고슬고슬 뽀얀 소금을 항아리에 담아놓고 쓰겠다는 생각은 오랜 숙원 사업이 되었다. 간수를 잘 뺀 소금으로 배추를 절이면 정말 꼬신 맛이 나는 것 같다. 지금은 집 항아리마다 소금을 가득 채워 두고 산다. 명품 소금장인이 될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소금 간수를 빼서 항아리마다 모셔두었을까. 맛난 김장을 해보려고? 김치 장인이 되려고 그랬나?
어느 날 김치를 하면 색깔이 야릇했다. 빨간 것도 아닌 것이 검은 것도 아닌 것이 불긋하며 거무죽죽했다. 이건 백 프로 고춧가루 탓이다. 그때부터 태양초 고추를 원했다. 고춧가루가 맛있어야 음식 맛이 살아난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고춧가루에 대한 불만을 지금은 집 앞 텃밭에 한탄을 하며 풀고 있다. 좋은 고춧가루를 사용하기 위해 유기농 무농약 고추를 재배했다. 맨 땅에 흙을 붓고 거름을 뿌리고 돌을 골라내고 풀과 싸우면서 농사를 지었다. 파, 양파, 마늘, 당근, 시금치, 상추, 부추, 호박, 오이, 콩, 토마토, 수박, 참외, 참깨, 들깨, 옥수수, 생강, 고구마, 감자. 먹고살겠다고 참 여럿 많이도 키웠다. 이게 먹고살자고 할 짓인가! 태양초 고춧가루를 사다 먹을 것이지 왜 나는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을 욕하며 고추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일까. 무수히 많은 농산물을 왜 나는 팔, 다리, 허리를 두들겨 가며 생산해 내는 것일까.
나는 특별히 도전정신이 투철한 것일까? 아니면 완벽주의? 나는 현모양처 강박증인가? 현모양처 강박증? 그런 병이 있다. 주부는 누구나 아는 병이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사회 이곳저곳에서 받은 세뇌 교육이다. 나는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 확실하다. 잘 받다 못해 쑥쑥 흡수해 버렸다. 중학교 때 신사임당 그녀를 만났다. 교실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벽면 한쪽에서 늘 나를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매일 말했다. ‘현모양처가 되어라. ’ 그런 고정된 여성상이 나에게 박혔던 것일까? 사회가 만들어준 여성상. 그리고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 현모양처가 되려고 한 것일까?
남편은 내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했다. 그럼 바느질이나 여타 다른 취미생활은 왜 열심히 한 것일까. 남편은 집안일에 도움이 되니 한 것이 아닐까 했다. 사실 바느질은 꽤 도움이 되었다. 바짓단 꿰맬 때 쓴다. 지금 하는 가게의 소품들, 쿠션, 커튼 등 천이 들어가는 소품들은 모두 내 손바느질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도움이 될 것 같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좋아서 했다. 그래서 열심히 했고 아직 못 버리고 있는데... 내 손으로 뭘 만들고, 내 손으로 만든 걸 선물하고 하는 게 좋아서. 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수제를 그렇게 고집하는지도 모른다.
내 손으로 무얼 한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그랬나 보다. 나는 내가 이루는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바로 서는 것, 그것을 원했던 것 같다. 사회와 동떨어져 집에 고립되어 아이 키우며 밥만 하던 나에게 스스로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게 참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죽을힘을 다해 무엇인가를 열심히 한 건 나도 사회의 일원이라는 막연하지만 강력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희미해져 보이지 않는 내 존재감의 표출.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기 위해 나는 아득바득 애를 쓴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이다. 집 대문이나 들락날락하며 아이 키우는 주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는 집 문을 죄다 두드리며 나름의 사회적 활동을 해 왔다. 옆집, 시댁. 낯선 곳에서 두드릴 수 있는 곳은 한정돼 있었다. 그나마 공공적으로 두드릴 수 있는 곳이 더 있었는데 도서관과 문화센터 정도였다. 아이들이 크면서 유치원을 다니며 차차 인간관계의 범위가 늘기는 했다. 그건 첫째 아이가 5세가 되면서부터였다. 가장 빈번하게 다닌 집이 인터넷이라는 집이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사회성이 좋다는 말이었으면 딱 좋을 뻔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사회성은 꽝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나는 사회적이기를 바랐다. 나는 결혼 전에도 아이를 낳기 전에도 가족 이외의 사회라는 공간에서 개인적인 나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였다. 특별히 여자라서 좋은 엄마, 멋진 주부가 되기 위해 태어나고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린 시절과 20대를 살았다. 그러던 것이 한순간에 결혼과 출산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저 힘든 줄만 알았다. 나는 사회와 가정, 아이와 나 사이에서 내 존재가 설 자리를 찾고 있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어두운 길을 방향등 없이 더듬더듬 걸으며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찾기 위해 내 작은 손으로 문마다 똑똑 두드려가며 열리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우리 세대 누구도 엄마가 되기 위해, 아내가 되기 위해, 밥 하기 위해 교육을 받지 않는다. 왜 학교와 사회는 나에게 사회적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돈을 벌고 살 것이라는 꿈을 키워 주었나. 나의 꿈은 우주 비행사였고, 선생님이었고, 과학자였다. 단 한 번도 밥을 하고 아기 밥을 먹이는 주부가 아니었다. 왜 사회는 주부라는 이름을 나에게 감추었나.
이제는 당당히 나의 이름이 된 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