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살림에 의욕이 넘친다. 때로 억울하다.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는 가족들. 가정이라는 공동체 속에 주부는 살림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고군분투하는데 다른 구성원들은 자신의 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주부는 집안일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하늘과 땅을 넘나드는데, 가족들은 늘 한결같이 집안일 앞에 마음이 평화롭다. 마음의 평화, 그것은 내가 딱 원하는 것이다. 밥걱정, 빨래 걱정을 안 하고, 집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먼지 걱정을 않는 그들은 어쩌면 정신 승리자가 아닐까? 나보다 먼저 무념무상 궁극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닐까? 밥이 안 된다면 라면을 먹으면 더 좋은 가족들. 쓰레기가 발치에서 굴러 다녀도 신경 안 쓰는 그들. 왜 나만 애가 마르고, 나만 열불이 나고, 나만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부터 바뀌었다. 빨래를 개면서 달라졌다. 많은 빨래를 혼자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무리는 무슨 모든 사람들이 하고 사는 일인데 약한 소리 하기는! 매일 20분을 정해 빨래를 개기로 마음먹었다. 빨래를 처음 갤 때 나는 ‘나는 수행자다, 도를 닦자, 마음 수련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만 하기에는 억울한 마음도 가끔 불쑥불쑥 올라왔다. 그러다 힘이 드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가족들에게 기댔다. 가족들은 힘이 되어 주었다. 함께 빨래 개는 날이 늘어나면서 빨래는 가족들에게 천천히 스며들었다. 가족들이 빨래에 스며들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살림을 전파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작정하고 전파를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주인의식을 장착한 주부, 나만의 살림집으로 가족들을 초대한 꼴이 되었다. 음하하하. 감동적인 살림의 세계로의 초대. 매일 행동으로 말하는 주부의 강력한 언어에 하나 둘 관심을 보이더니 100일 후 모두 동화되었다. 심지어 집 밖(마당과 정원, 밭, 가게)에서는 주도적인 남편은 집 안에서 만큼은 무관심으로 일관했었다. 그것이 바뀌고 있다. 그건 내 글을 읽어서 변화하는 것일 수도 있고, 100일 미션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변화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노력하는 만큼 가족들을 품을 수 있고 같은 방향으로 함께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함께 빨래를 갠다. 빨래가 많으면 함께 푸념한다. 비록 지금은 세탁되어 소파 위에 있는 빨래 한정이지만 푸념도 불평도 나누면 가벼워진다.
가끔 가족들도 양말이 없거나, 당장 입을 옷이 없을 때에는 당황하기도 한다. 주부는 일을 떠맡아 힘들고 때로 부당하다 생각하는데 가족 구성원들은 당황하고 조금 불편할 뿐이다. 양말이 없으면 맨발로 나가도 되고, 바지가 없다면 다른 바지를 입으면 된다. 입고 싶은 옷을 못 입으니 조금 기분이 상할 뿐이다. 그런 경우 구시렁대며 옷이 없다고 불평을 한다. 그러면 주부는 옷을 바로 샀다. 맞다, 미처 빨래가 안 되는 일이 반복되면 옷이 모자라서 그런가 하여 옷을 샀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미리미리 얘기해야지? 빨래가 위로 계속 쌓이는데 어떻게 알아! ” 아이도 나도 기분이 상했다.
요즘은 낮은 음성으로 말한다. “긴급한 세탁은 건조대에 올려놓자.” 고성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견을 내놓았다. 어느 날 주섬주섬 세탁바구니를 뒤지고 있는 복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건조대에 바지가 올라왔는지 모른다. 말수가 적은 복이는 말없이도 나에게 빨래로 말을 한다. ‘바지를 먼저 세탁해 주세요.‘ 살림 속에서 빨래라는 언어로 우리는 말을 한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00일이 넘게 걸렸다. 매일 빨래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 연습한 끝에 나온 아름다운 언어다.
복이로 말하자면 일 년 전, 다 돌아간 건조기에서 자신의 바지 하나만을 꺼내고 건조기 문을 예쁘게 닫았던 아들 녀석이다. 이제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버튼을 이해하고 적용할 줄 안다. 구김방지, 표준 등의 언어 사용한다. 살림의 언어 또한 일상 언어와 마찬가지로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 배우다 속이 터질 수도 있다는 건 모든 언어와 결이 같다.
나 혼자 에너지가 넘치다 폭발할 수 있다. 가족들에게 살림의 언어를 널리 알리자. “집에 가면 빨래부터 개자. “ 우리의 ‘살림 언어’는 미리 주지 시켜 주기다. 잔소리와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
나는 주부라는 굴레, 살림, 집안일이라 구렁텅이에 혼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 이 깊은 구덩이에서 나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누군가가 나를 여기서 꺼내주지는 않을까. 누군가 사다리를 놓아주지는 않을까. 누군가 좀 보아달라고 목청껏 외쳤다.
그런데 식구들을 이 깊은 구덩이로 데리고 와보니, 이 구덩이도 꽤 살만하다. 우리는 깊고 아늑한 살림이라는 깜깜한 구덩이 안에 아담한 등불 하나를 켜고 옹기종기 앉았다. 거실 빨래터에 앉은 우리는 바삐 손을 놀린다. 태산처럼 쌓여있던 빨래 대신, 우리는 이야기 산을 쌓아 올린다. 새롭고도 아담한 우리의 소통의 장이 생겼다. 왁자지껄 빨래터라는 나눔 장터. 오늘 빨래터에선 자신의 속옷조차 못 찾는 남편의 허술한 모습을 보았다. 모두의 속옷을 구분하는 큰아이의 대단한 눈썰미도 엿봤다.
주부는 그동안 집안일을 하며 얼마나 가족 구성원들과 소통했나? 바지를 빨아서 아침 등교 시간에 맞춰 대령하는 것이 주부의 일이 아니었다. 빨래를 열심히만 하는 게 주부의 일이 아니었다. 살림으로 소통하고 살림을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그 중심에 서는 것이 주부의 일이다. 빨래의 전 과정을 가족이 함께 하고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주부의 일이다. 아이들을 꼭 집안일을 시켜야 할까? 당연하다. 나 혼자선 힘들다. 힘들다 지친다. 억울하고 분통하다. 왜 그러고 살았나? 답답한 진실을 풀어놓고 나니 후련하다.
그렇다고 집안일 전부를 엔 분의 일로 나누어하는 건 아니다. 하나씩 천천히 나누고 있다. 하나 둘만 나눠도 주부에게서 덜어지는 마음의 짐 크기는 엄청나게 크다.
우리는 ‘우리’라는 가정을 함께 꾸리는 가족이다. 살림과 집안일이라는 이 아름다운 구렁텅이에 함께 있을 예정이라서 더욱 함께 해야 한다. 가족은 함께 산다. 함께 하고, 함께 먹고, 함께 즐기고, 함께 누리고, 행복하다. 나는 함께 집안일도 하는 ‘우리’라는 집에 살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우리 집이라고 한다.
주부만의 ‘살림의 언어’가 있을 테다. 점검해 보자. 혼자만의 언어를 머릿속에 굴리고 있었던 아! 옛날이여. 설거지를 하며 물을 콸콸 틀어놓고 옛날 영사기와 같은 반복화면을 재생시키던 날들. 나만의 언어를 혼자 내뱉으며 얼마나 눈물, 콧물을 짰던가. 그래 오래전부터 나에게도 살림의 언어가 있었다. 나만 알고 있었던, 그래서 가족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던 나만의 언어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