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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하게 꺾어진 네 허리

겨울 화분 속 대파를 씻으며

by 눈항아리

밭에서 겨울을 보낸 대파는 한파에 얼어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봄이 되면 천천히 파가 올라온단다. 봄 파가 올라오기 한참 전에 밭을 갈아엎으니 봄날의 파는 볼 수가 없다.


늦가을 부직포 화분에 옮겨 심은 대파는 창고에서 겨울을 났다. 따뜻한 기운이라고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 한 줌이 전부일뿐인 차디찬 실내에서, 대파 화분은 겨울을 보냈다. 창고는 보온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벽과 천장으로 막힌 공간이다. 바람을 피할 수 있어 그래도 좀 나았을까? 동파 방지를 위해 아주 추운 날 틀어 놓는 미니 라디에이터가 작은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겨울날의 보기 드문 초록을 보겠다고 화초 삼아 키우는 것도 아니요, 초록 이파리를 뜯어먹으려고 심어놨으니 파의 수난이야 안 봐도 뻔하다. 벌써 한 번씩 초록의 늘씬한 몸은 다 잘라먹었다. 싹둑 잘리고 남은 하얀 줄기는 상처를 치유하며 힘겹게도 흙에 파묻힌 뿌리에서 영양을 빨아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또다른 겨울날 싹둑 잘라먹은 하얀 파 위로 연둣빛 새싹이 봉긋 고개를 내밀더니 늘씬하게 키를 키워갔다. 얼어 죽지도 않고 꿋꿋했다. 그리고 새로운 이파리들을 마구 피워냈다. 겨울날의 꽃과 같았던 연두 이파리는 안 본 사이 초록 색으로 변했다. 대파 키가 30센티미터를 훌쩍 넘었다.


키만 크면 뭐 하나, 연약하기 이를 데 없다. 꼿꼿하게 서서 겨울 추위를 버티던 대파의 기상은 사라졌다. 잘라왔더니 좀처럼 서있지를 못한다. 풀 죽은 어린아이의 어깨처럼 축 늘어진 초록 파를 찬물에 헹궜다. 금세 물을 먹어 흐물거린다. 연약한 새살을 뜯어먹는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


창고에서 겨울을 난 화분 대파/ 2회차


겨울을 버티어 강하기만 한지 알았는데 근근이 버티며 살고 있었구나. 그런 너의 살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 버리고, 두 번이나 잘라먹었다. 찬물에 담가 축 늘어진 너를 안았을 때 의 느낌이 아직도 선연하다. 허망하게 꺾어진 허리, 쓰러진 네게 몇 번이나 사과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런데 허약한 네가 참 맛있다. 파 맛이 뭐 파 맛이지. 국물 맛이 끝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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