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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May 10. 2024

흥망성쇠

마당 귀퉁이 어느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송엽국. 대부분 말라죽은 것 같다.


송엽국은 지난해만 해도 담장 아래로 기어가 골목길 바깥으로 순을 뻗어 나갈 정도로 흥하더니 추운 겨울을 나지 못했다. 아니면 짧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봄철 내내 분홍 꽃이 활짝 피기를 기다렸는데 통통한 초록 잎은 나오지 않는다. 말라죽어버린 파뿌리 같은 머리. 하얗게 새버린 마른 줄기들이 산발이 되어 돌 위에 얹어져 있다. 따뜻한 바람이 불면 새싹이 올라올까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다.


지난해 송엽국이 마당을 탈출하는 걸 보고 얼마나 웃음을 지었던가. 도로로 나가려는 그 녀석을 보며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들여다보곤 했다. 가출하던 그 녀석은 꽃까지 피워대며 난리를 피웠었다.


지난해 송엽국 만개했던 바로 그 자리에는 올해 노랑 씀바귀 꽃이 활짝 피었다.


그러나 씀바귀 노란 녀석의 흥도 오래가지 못했다. 전성기도 잠시 하얀 솜털을 단 홀씨가  나풀나풀 날아다니니 성난 남편 사장이 예초기로 확 밀어 버렸다. 내 예쁜 꽃들을 가위로 살그머니 자른 것도 아니고 기계 날로 단 번에 날려버려 꽃밭이 초토화가 되었다. 멀쩡한 다른 꽃 몇 포기도 함께 날아갔다. 침울해하며 왜 그랬냐 물었더니 뭐가 뭔지 모른다나. 나참.




테라스 앞 화단에는 제발 기계를 대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장사 준비를 미루고 아침부터 마당에 앉았다. 앉은뱅이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다니며 올해 첫 이발식을 거행했다.


아이들의 머리 자르기는 이 주 정도의 간격으로 해줘야 한다. 자르면 더 풍성해지는 것이 신기하다. 처음 머리를 자르면 조금 엉성해 보인다. 사람 머리와 똑같이 며칠 후 자리를 잡고 나면 어색한 모습이 사라진다.


왼손으로 풀을 휘어잡고, 오른손으로 가위를 들고 몽창 잘라준다. 풀벌레가 많으니 긴팔 옷을 입고 장갑을 착용한다. 테라스에는 원래 애플민트와 페퍼민트만 씨를 뿌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아이들도 간간이 자리를 잡더니 이제는 주인이 바뀌는 모양새다. 몇 송이 심어 놓은 국화가 주인 행세를 한다. 쑥이 올해는 더 풍성하게 올라오고 있다. 쑥쑥 자라 제일 먼저 최대 기준 키를 넘어간다. 중간에 누군가의 소행으로 운 좋게 싹을 틔운 앵두나무도 하나 올라온다. 민트는 사이사이 자잘하게 나온다. 바닥으로 기어 다니며 블록 사이에서 올라오기도 하고 테라스 나무 틈새에서 쑥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모든 풀들을 같은 길이로 머리채를 잡고 잘라 준다. 잡초라고 절대 뽑지 않는다. 남편 사장은 잡초라고 뽑아버리라는데 그럼 빈 공간이 생겨버린다. 이빨 빠진 것과도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다. 너무 짧게 자르면 노란 떡잎이 나오니 적당한 길이로 눕지 않는 길이로 짱짱하게 잘라준다. 우리 마당에만 쓰는 풀 다듬기 나만의 노하우다


어느 해는 테라스 앞 꽃밭에 체리 세이지 몇 개를 심었다. 체리 같이 조그만 분홍빛 빨강 꽃이 점점이 피었다. 몇 해 무심히 키우다 정원일을 열심히 해본다고 봄 철에 뿌리째 뽑아 버렸다. 죽은 나무인 줄 알았다. 뿌리 재 뽑아 버렸으니 당연 체리 세이지는 사라졌고 그 이후로 볼 수 없었다.


풀도 일 년생이 있고 다년생이 있었다. 뿌리로 겨울을 나는 식물이 있고, 나무로 겨울을 나는 식물도 있었다. 사라진 것 같아도 죽은 풀 같아도 봄이면 또 살아나는 게 신기하다. 체리 세이지를 보낸 이후로 풀이든 나무든 절대 뽑아 버리지 않기로 마음속으로 정했다. 이발식은 마당 식물들을 잘 모르는 초보 정원사의 안전 처방이다.



무더위를 감지한 장미가 덩굴손을 더욱 거세게 뻗치더니 드디어 일을 냈다. 담장 위를 거닐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쁨이나 받을 것이지 게가 어디라고 올라갔을까. 꼬장꼬장한 심뽀를 가진 침엽수 나무줄기를 타고 봄철 내내 끙끙거리며 가시 손을 감고 올라가더니 큰일을 냈다.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것이 까치집인지 참새 집인지 영 성가시다. 하늘 전망대 가장 몫 좋은 자리를 차지한 못된 녀석. 고 녀석이 빨간 꽃을 피웠다. 내 머리 위에! 나 머리에 꽃 꽂은 나무가 된 건가?


흥하고 망하고 성하고 쇠하는 것이 세상 이치란다.  꽃은 한철이니 그리 섭섭해 마라. 녀석이 마구 뻗쳐 나가면 사장이 또 나와 다 잘라버리는 수가 있으니. 안 그래도 네 머리까지 올라간 꽃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하는구나. 담장 밖으로 나가 늘어지는 장미 줄기를 잘라주고 묶어줄 계획을 세우고 있더구나.


나무는 묵묵히 하늘바라기를 하고 바람을 맞이한다. 나무는 늘 그 자리에서 보고 있다. 매년 봄이면 새싹이 돋아 나고 푸르름을 더하는 풀들을 본다. 연달아 선명한 색깔 꽃을 피우는 것도 본다. 그리고 쓸쓸하게 지고 떨어지는 꽃들을 아쉬워한다. 겨울이 되기 전에 잎을 모두 떨구는 목련 나무도 보았다. 키 작은 관목들의 애처로운 겨울나기도 보았다. 작은 풀들이 땅 속에서 웅크리고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것도 보았다. 나무는 모두 보아서 안다. 자신도 언젠가 고목이 되리라는  것은 보지 않고도 알고 있다.


흥망성쇠는 세상의 이치이지만 나는 늘 흥할 것으로 생각하고 빨간 장미와 같이 뽐내기를 좋아한다. 나무처럼 나도 작은 정원을 보아 알고 있지만 자주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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