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것은 숙제였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의 시기에도 나는 매주 수요일 아침이면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출근했었다.
내가 퇴직하고 나서도 그 일은 몇 달간 계속되었고,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잠시 멈추었다가 서울로 돌아온 후 다시 개시. 몇 년간 계속되었던 수요일 아침, 함께 걷는 출근길이 나의 사정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나는 무척이나 미안했었다. 그래서 다른 일정으로 만나보자.. 고 했던 말은 숙제로 남아 해를 넘겼다.
그녀는 나의 직장 동료이자 후배. 몇 년 전 사고(자취방에서 혼자 쓰러진 후 뒤늦게 발견되어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그런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 이후 혼자서 '잘' 걷는 것이 불편해진 사람. 한쪽 팔과 한쪽 다리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져서 지팡이를 짚으며 조심조심 걷는 사람이 되었다. 사고 후 휴직과 복직, 그리고 그녀의 신체 형편을 고려한 새 부서로의 인사발령 등의 일이 있었지만, 주중 이틀 이상은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고, 집에서의 생활은 여동생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을 형편이 되었다. 직장까지 그만두고 언니를 도와주는 그녀의 동생이나 지방에 사신다는 그녀의 부모님까지 그 가족의 삶이 얼마나 흔들렸을까 싶어 조금이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시작한 일이 일주일에 딱 하루, 가족이 아니라 내가 아침 출근길을 함께 해 주는 일, 그것을 해 왔던 것이다.
그 일은 참 즐거웠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 그녀 옆에서 천천히 속도를 맞추며 걸으니 나 혼자였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거리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천천히 걸으며 보게 된 상점들의 소윈도와 간판들. 그리고 그런 관찰에 대한 우리 둘의 대화는 어제저녁 뉴스부터 시작해서 요즘 읽는 책, 그리고 연예인 소식까지 다양한 주제로 하하 호호 나누었다. 비가 오거나 추운 겨울에는 내 차로 이동하기도 하였는데, 그렇게 걷기도 또는 자동차를 타기도 하면서 그런 세월을 4년쯤 보냈던 것.
그런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그것도 내 사정으로 할 수 없게 되자 나는 정말 미안했다.
그래서 일을 삼아서라도 어느 하루, 그녀를 위한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녀에게 물으니
'안산 자락길'을 걸어보고 싶단다. 7.4km. 시작한 곳에서 끝내야지, 중간에 힘들다고 빠져나가려면 보행이 불편한 그녀에게는 거의 걸을 수 없는 경사길이거나 계단길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코스. 그래서 한번 들어서면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하는 그 7.4km 걷기를 그녀가 도전해 보고 싶다고 하는 것.
내게 그 코스는 일도 아니다. 나는 혼자서도 그 안산 자락길 7.4km를 휘적휘적 잘 걷곤 했다. 집에서 나가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거의 10km 길인데, 한 바퀴 걷고 돌아와 샤워를 하면 얼마나 뿌듯하던 지. 겨울에도 여름에도 봄에도 가을에도 가끔씩 그렇게 혼자서도 걸었었던 코스. 그래서 그녀와 함께 걷는다면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고, 걷기를 마친 후엔 어디서 맛난 것을 먹는 그런 계획은 단 몇 초만에 좌락 세울 수 있었지만, 문제는 날짜를 잡는 일이었다.
그녀는 주말이면 경기도 이천의 본가로 간다. 주중엔 휴가를 거의 쓰지 못한다. 병원 치료, 물리치료 등을 위해 연차휴가도 쪼개고 쪼개서 사용해야 하는 형편. 어쩌다 주말에 본가에 가지 않고 서울 집에 머무를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럴 때는 내가 문제였다. 나는 과로사를 걱정해야 하는 은퇴자 백수요, 주말엔 더욱 바쁘신 사람. 그래서 견우가 직녀를 만나듯 우리가 딱 하고 맞출 수 있는 그런 날을 숙제처럼 고대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지난 4월의 어느 주말, 그녀가 본가에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게는 미룰 만한 일정이 하나가 있을 뿐인 토요일. 후다닥 만나기로 정해버렸다. 몸이 불편한 그녀에게는 날씨도 중요한데, 일기예보 마저 쾌청쾌청~~
너무너무 행복했다, 그날의 걷기는.
4월 마지막 토요일, 오전 10시, 그녀의 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땀 닦을 손수건과 짚고 걸을 지팡이만 챙기면, 먹을 것과 이런저런 준비물은 내가 담당한다고 선언.
예전에 같이 출근하던 그 아침처럼 내가 그녀의 집 앞으로 가서 시작하기로 했는데..
약속시간보다 일찍 갔다. 그런데 그녀 사는 동네 입구 저 멀리에 그녀의 모습이 짜잔~
느릿느릿 지팡이를 집고 조심조심 걸어오는 커다란 덩치의 그녀. 벌써 나오다니...
설레었겠지. 기다려졌겠지. 조그마한 슬링백을 둘러 매고 약속시간보다 일찍 횡단보도 앞까지 나온 모습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얼른 택시를 잡아타고 이동하여 서대문 자연사박물관 앞에서 내렸다. 그곳에서부터 안산자락길 걷기 시작!
봄날의 맑디 맑은 하늘, 여유롭게 걸어가는 어른들과 아이들 모습은 토요일 오전의 행복한 풍경 그 자체였다.
무장애길임을 자랑하는 서대문구의 안산자락길은 대부분은 나무 데크길이어서 휠체어를 타고도 한 바퀴돌 수 있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다.
연둣빛으로 올라온 잎사귀들이 초록을 더하고, 여기저기 피어난 꽃들.
그 속에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스러운 꽃 향기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이런저런 새소리.
얼마나 행복한 숲길이던지. 할 수만 있다면 투 스텝으로 걷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두둥~
조심조심 걷는 그녀의 팔을 잡아주려니까 그냥 혼자 걷겠단다.
그래서 나는 앞서 걷고 그녀는 뒤에서 따라오는 모습으로 천천히 걸었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 그녀가 저 멀리서 오고 있곤 했다.
너무 멀다 싶으면 그 방향 그대로 그녀를 보면서 뒷걸음질로 걸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걸음 속도는 저절로 천천히 천천히...
그러다가 어느 틈에 그녀가 가까이 와 있으면 나는 다시 뒤를 돌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 뒤에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잘 걸어올 그녀를 의식하며 나는 또 천천히 천천히.
가끔 벤치에 앉아 물을 마셨고, 사탕도 까서 먹으며 당을 보충했다.
점심으로 싸 온 김밥은 한 줄씩 똑같이.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그녀가 더 많이 먹어야 할까... 싶어 물어보면, 똑같은 양으로 먹잖다. 아무렴!
대저 토마토와 고추처럼 생긴 파프리카까지 공평하게 딱 한 개씩 나눠먹으며 하하 호호 하하 호호.
천천히 걸었는데도 그녀는 땀이 줄줄 흐른다.
오랜만에 흘리는 땀이라 좋다고는 했지만, 그늘에서는 한기를 느낄 수 있으므로 걷는 속도와 쉬는 포인트 등을 염두에 두고 다시 또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마침내 아침에 시작했던 자연사박물관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오전 10시 조금 지난 시간에 걷기 시작했으니 7.4km를 6시간에 걸쳐 걸은 셈. 그런데도 별로 피곤하지 않은 우리 둘. 다시 택시를 타고 그녀 집 동네로 이동.
그녀 동네에 있는 유명한 빙수집에서 올해의 첫 빙수를 영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사진 찍기에 게으른 나인지라 몇 장 되지 않는 그날의 사진 속 우리들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활짝 웃는 모습으로 말해주었다.
이런 기쁜 날, 그녀에게 더 만들어 주고 싶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계절 봄가을에 한 번씩, 이런 시간을 가져보자고 마음먹는다.
물론 천천히 천천히 걸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