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 가족과 살고 있는 50대 솔로다.
그 나이가 되도록 집에서 독립하지 않고 비혼으로 살았냐고 묻는 다면,
그때마다 나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궁색한 대답을 한다.
어쩌면, 나 혼자 살아보기나 다른 역할로 전환해 보는 것에 실패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50년 넘게 했던 딸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미성숙한 것 투성이었다.
지난 몇 년 간 아픈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덕분에'라는 말보다 '탓'만 드린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 힘들었던 시간은 나에게 커다란 성장을 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이제, 그 따스한 희망과 위로를 담아 '오! 오!' 감탄사로 쓸 수 있는 오오 이얼즈.
딸 역할로 '덕'과 '탓'이 된 가족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나 혼자 산다'가 안 되는 솔로의 변명
변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원가족과 살아서 '덕'과 '탓이 된 유구한 사연이 좀 있다.
나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여기엔 엄마의 죄책감이란 지분이 들어 있다.
엄마는 우리 오 남매를 낳는 동안 두 번이나 낙태수술을 했다.
지금과 다르게 6,70년대는 낙태가 허용되었다. 산아제한 정책이란 게 있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 낳아 잘 기르자.' 이런 구호를 만들어 낼 정도로 베이비 붐 시절이었다.
그런 규제가 아니더라도 엄마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지 않았다. 아들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의 부추김만 아니었다면 1남 2녀로 마감할 계획이었다.
정작 피임 방안은 없으면서 엄마에게 위험 부담만 있는 임신은 계속 이어졌다. 낙태라는 더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민간요법 같은 검증되지 않는 방법을 시도하다가 실패해서 위급상황이 되니 병원을 찾아갔을 것이다.
나를 지우러 병원에 갔을 때는 첫 낙태 수술 때와 다르게 엄청 떨렸다고 한다.
그날따라 병원은 순번을 기다릴 만큼 북적였다는데, 엄마는 그 고무된 분위기에 독려? 되진 않았던지 본인 차례가 되면 뒤에 사람에게 양보했다. 몇 번 더 미루다가 슬쩍 병원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나는 엄마의 살기(殺氣)와 두려움 같은, 모순된 양 극단을 오가며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딘가 음습하고 고장 난 아이 같았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출생신고도 미룰 만큼 죽을 고비도 넘겼다. 홍역 후유증으로 3년간 앓아누웠는데, 그땐 다들 죽을 거라고 했다. 죽음은 늘 내 가까이 있었지만, 그 예상은 비껴갔다.
12살 때,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적도 있는데, 운 좋게 살아났던 걸 보면, 신이 정한 각자의 생명 기한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세상에 나왔다는 것만으로 기적처럼 여겨야 하는데, 허약한 몸으로 사는 건, 무척 힘겹고 고달프다.
골골 대던 나는 무얼 해도 평균 미달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자주 결석을 해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행히 미술과 국어(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가늘고 길게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장을 받기까지 오래 걸렸다.
성인이 되고도 몸무게가 40킬로그램대를 넘겨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뚜렷한 병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허약체질 그 자체였다.
도자기공예를 전공했지만, 힘에 부쳐서 끝까지 할 수 없었다. 큰 힘이 들지 않는 공예 관련 자격증을 따고 학원 강사로 취직했다.
주 3일 출근하는 일인데도 하루 일하면 하루는 꼬박 뻗어 버렸다. 체력이 따라 주지 않았다. 감정노동도 극심했다. 불면증, 두통, 신경성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죽겠지 하는 심정으로 버텼다. 그렇게, 10년이 지나자 내 삶에도 변화가 왔다. 일에 대한 자신감과 성취감뿐 아니라, 내 몸의 건강도 유지시켜 줬다. 여기에 관한 일화는 긴 지면이 필요하니, 다음에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다.
낙태하려다 실패해서 어쩔 수 없이 낳았던 네 번째 아이.
내가 일련의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는 동안에도 엄마는 거리낌 없이 또 낙태했다.
3년간 죽은 듯이 누워 지내다가 살아난, 나의 질긴 생명력이 경이로웠던지 다음번 아이는 기쁨으로 낳았다.
엄마는 내가 부실한 게 당신 '탓'이라 여겼다. 내가 안정권 안에 머물러야 마음을 놓는 불안 증세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 엄마는 나와 함께 울고 웃는 딸 바보 엄마가 되었다.
그 '덕'에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그림이나 공예를 배울 수 있었고, 관련된 소규모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다. 부모님 덕분에 그다지 굴곡 없는 삶을 살았다.
어느덧 돌봄만 받던 딸에게도 부모 돌봄의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