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로 그 아이 Apr 15. 2024

나도 유치원에 갈래요

노란 체육복을 입고

제법 따가워진 햇살이 일감치 문밖에 와 기웃거리고 있었다.


옆집 주야는 벌써 유치원에 갔다. 노란 세라복에 노란 가방, 노란 모자. 온통 노란색뿐이었다. 유치원은 뭐 하는 델까? 대체 뭐 하는 곳이길래 아침마다 주야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신이 나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가고 싶다, 정말 가고 싶다. 하지만 엄마는 안된다고만 하셨다. 주야는 유치원 가고, 오빠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너무 심심했다.


때마침 바람 한 줄기가 휙 지나갔다.

"유치원 가기 딱 좋은 날이네." 나는 몸이 근질거려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유치원에 가야겠어." 옷장 서랍을 마구 뒤졌다.

"어디 보자, 노란 옷, 노란 옷이 어디 있나." 유일하게 작은오빠 체육복이 있었다. 좀 크긴 했지만 입기로 했다. 모자도 있었다. 다만, 커서 눈을 덮었다. 챙을 뒤로 돌렸더니 앞이 보였다. 

'오케이, 됐고.'

그림책 가방에 그림책을 몇 개 넣고 야무지게 멨다.


마당에서 엄마가 빨래를 널고 계셨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최대한 빨리 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붙잡히면 엄마가 못 가게 하실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생뚱맞은 복장으로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었으니, 태클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 나는 작은 보폭이 안 보일 정도로 힘차게 저어 대문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는데 엄마가 부르셨다.

"정아, 어디 가는데? 옷은 또 뭔데?" 나는 꽁무니가 빠지게 대문을 나섰다.

"휴..." 


당시 엄마들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일일이 간여하지는 않았다. 밥만 먹여 놓으면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알아서 잘 논다. 뽀시래기들은 주로 마당이나 집 근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위험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오늘 여느 때와는 다르다. 유치원에 가야 했다. 그 유치원은 원생이 한 명뿐이다. 선생님 없고, 백 퍼센트 현장 학습을 한다. 바로 '정아 유치원'이다. 나는 노란 옷도 입었고, 노란 모자도 썼고, 가방도 메고 있었다. '어딜 봐서 유치원생이 아닐 것인가?' 뭔가 모르게 뿌듯하고 신바람이 났다.


골목을 빠져나와 동네를 찬찬히 살피면서 걸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는 벌써 채소장수 할머니가 물건을 팔고 있었고, 엄마 이끌려 가는 어린아이가 발을 구르며 떼를 쓰는 모습도 보였다. 큰길 따라가다 보오빠 친구 집이 나다. 그 집 대문에는 사자 얼굴의 문고리가 있었다. 그 문 안쪽에는 뭔가 무시무시한 게 있을 것 같아 평소에도 으스스했다.


조금 가다가 나는 초록 대문 앞 계단에 앉아 그림책을 펼쳤다. 그림에는 남녀 할 것 없이 죄다 수염이 그려져 있었고 다리에는 털이 수북했다. 남아 있는 이빨은 몇 개 없었다. 오빠들은 어릴 때 개구쟁이였음이 분명했다. 

"오빠들은 못 말린다니까."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집과 제법 먼 교회까지 왔다. 주야를 따라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았다. 교회를 올려다보니 십자가 끝에 흰구름이 걸려 있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주야 집까지 왔다. 나는 주로 주야와 놀았기 때문에 주야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주야네 마당 포도나무에는 언제부터인가 푸른 포도송이가 열려 있었다. 그 광경이 참 신비로웠다. 꽃도 없이 나무 몇 그루만 삭막하게 서 있던 화단에 누가 매달아 놓고 간 듯 포도 열매가 덩그러니 열렸다. 허전하던 화단이 포도 한 송이로 인해 생기가 돌았다. 바위에 앉아 포도송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즐거움 샘솟아 내게도 웃음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여섯 살의 내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저 푸른 포도를 보며 웃을 수 있다면 말이야.'


나는 일어나 담벼락에 귀를 대어 봤다. 담 너머에는 우리집이 있다. 엄마는 아직도 마당에 계실까? 아님 내가 어질러 놓은 옷장을 정리하느라 분주하신 걸까? 기척이 없었다.


나는 행복했다. 조금 있다 엄마한테 달려가 안길 생각이었다. 어리광도 좀 부려야겠지. 아니, 어쩌면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대가로 솜방망이 같은 엄마 손이 내 엉덩이를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떠한가, 그 또한 행복인 것을.


여섯 살.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아무런 걱정도 슬픔도 없는 완벽에 가까운 행복을 누리던 시절,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하늘을 향해 해맑은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이전 02화 엄마는 슈퍼우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