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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Apr 08. 2024

엄마는 슈퍼우먼

백색가전이 없던 시절

내가 6살이던 1970년대 중반에는 가전제품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다. 구입 비용이나 놓을 공간, 전기세 등 서민들이 그것을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보일러, 가스레인지 등의 문명의 이기들은 서민들과는 친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생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당 부분의 노동을 주부들이 감당해야 했다. 세탁기가 없었던 엄마들은 쭈그리고 앉아서 빨래판에 빨래를 올려놓고 두드리고 비비면서 때를 뺐다. 큰 대야 가득 산더미 같이 쌓인 빨랫감들은 빨아도 빨아도,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빨래를 다 해도 탈수기가 없으니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있는 힘껏 쥐어 짜야했다. 아무리 비틀어 짜도 물기를 다 거둘 수 없었기 때문에, 겨울 엄동설한에는 빨랫줄에 넌 빨래가 얼어서 동태가 되었다.


꾸덕꾸덕해진 빨래들은 짓궂은 오빠들에게 악당 취급을 받았다.

"내 주먹을 받아랏! 퍽퍽, 으악 감히 니가 나를, 분하다..."

소매 끝에 달린 크고 작은 고드름은 그들의 무기가 되었다.


나는 그런 오빠들을 구경했다.

"음,,, 역시 잘 노."

나는 빨래 앞으로 다가갔다. 소매를 붙잡고 악수를 하면 아사삭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습한 장마철에는 그 빨래를 또 어떻게 말릴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온다.


냉장고도 없었다. 아이스박스는 그나마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고 한참 뒤에 사용했다. 여름에 시원한 얼음을 얼리는 것은 꿈이다. 아이스크림을 사 와도 오래 둘 수가 없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약주 한 잔 하고 오시면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사 오셨는데, 우리가 모두 자고 있어서  벽에 있는 못에 걸어 놓으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녹은 채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아깝게요.


냉장고가 없으니, 꼭 냉장 보관해야 하는 생물보다 말린 생선, 포 등을 선호했을 것이나물도 고사리, 시래기 등 말린 것이 오래 두고 이용하기에는 편했을 것이다. 냉장고가 있어 누릴 수 있는 편리함 대신 더 알뜰해지고 지혜로웠을 것이기에,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구입하고 양이 많은 것은 말리고 절여서 저장성을 높이는 노하우가 쌓였을 것이다.

내 나이 여섯 살에 서른일곱 살의 젊은 우리 엄마 지혜롭고 영민하게 살림을 이끌어 나갔을 것이다.


더욱 부지런해야 했다. 화구가 여러 개인 가스레인지 대신 곤로를 사용하려면 여러 가지 음식을 동시에 조리할 수 없으니 식사 시간에 맞춰 미리미리 순차적으로 완성해 놓아야 한다. 겨울에는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항상 긴장을 놓아선 안되고, 외식이란 개념이 없었으니 돌아 서면 밥, 돌아 서면 밥. 하루가 밥 걱정으로 저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주하는 하루는 얼마나 버거웠으려나. 서른일곱 살 우리 엄마, 한숨 돌리며 차 한 잔 면 좋으련만. 인생은 오래 씹을수록 단맛 나는 칡뿌리 같은 것 아니겠냐며, 너털웃음 돌려 드리면 좋겠건만.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언제나 우리 앞에는 깨끗한 옷이 있었고, 따뜻한 밥이 있었고, 포근한 잠자리가 있었다. 그 시절 엄마는 우리를 지키는 슈퍼우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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