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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Apr 01. 2024

추억을 꺼내 먹어요

정아의 여섯 살 인생

어릴 때 이사를 참 많이 다녔다.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필순이 집, 규태 집, 영신이 집, 아버지 회사 사택, 광호 집 등 우리가 살던 집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세 들어 살다 보니 짧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어김없이 집을 옮겼을 것이다.


몇 년 전 아버지에 이어 엄마까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삼 형제는 그 옛날 우리가 살던 동네를 찾아가 보았다. 아버지, 엄마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었다. 한 집, 한 집 모두 찾아가 보았다. 놀랍게도 집은 다 그대로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집들이 너무 작고 낮은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거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나, 이런 곳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다고?"

여섯 살 나에게는 이 집도 컸었다. 하지만 엄마 아버지께는 매우 좁았을 것이었다. 비좁고, 어둡고, 환기도 잘 안 되는 부엌에서 엄마는 날마다 불을 지피고 마치 요술사처럼 정해진 시간에 음식을 뚝딱뚝딱 만들어서 우리를 먹여 주신 것이다. 그것은 기적 같았다. 난 이런 곳에선 요리를 절대 못하겠다.


그중에서 기정이 집은 칼국수 집으로 개조되어 안에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주인집 방과 마루가 있던 자리였다. 오빠들과 나는 칼국수와 만두를 시켜 먹으며 옛날 얘기를 꽃피웠다.


나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기정이네는 마루에 피아노가 있었다. 평소에는 언감생심 쳐보자고 말을 꺼낼 수도 없었고,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는 주로 열쇠로 잠그고 다녔기에 어차피 그림의 떡이었다. 어느 날 기정이 가족이 여행을 갔다. 이틀 밤 자고 온다고 했다. 나는 허락도 받지 않고 피아노를 치는 건 안될 일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이미 피아노 앞에 있었다. 피아노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잠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그머니 뚜껑을 열어보니 열려 있는 거였다.


가슴이 미치도록 뛰었다. 여섯 살, 치고 싶어도 칠 수 있는 곡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아주 잠깐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연주자 흉내를 내며 우아하게 두드려 보았다. "띵, 또딩 땡......" 음은 제멋대로였지만 황홀했다. 나는 행여 누가 들을 까 봐 얼른 뚜껑을 닫고 도망치듯 나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피아노 소리를 들으시고 문밖에까지 나가서 그들이 오는지 멀리 망을 보고 계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잠시이긴 하지만 내 소원을 들어주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왔다. 집을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 구석으로 돌아 들어가면 우리가 살던 집이 나온다. 수돗가가 나오고 더 들어가면 부엌이 나오고, 부엌과 연결된 문을 열면 안방이 나온다.

그곳은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창고로 쓰인다고 했다.

"뚜벅 뚜벅"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그 모든 날들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릇 소리,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모퉁이를 조심스럽게 돌아서고 있었다. 그때, 허리 숙여 상추를 씻으시는 엄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눈물을 훔치고 다시 걸어갔다. 엄마가, 돌아보셨다.

"정아,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많이 기다렸잖아. 어서 손 씻고 들어가자. 니가 좋아하는 상추쌈 해 놨어"

여섯 살 정아가 엄마 품으로 달려 가 안기고는 부엌을 거쳐 방으로 들어갔다.

"우와, 이게 뭐야? 솜사탕이네?"

방 안 가득 실몽실 솜사탕이 있었다.

나는 솜사탕을 들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앙, 맛있어요, 엄마"

그것은 바로, '추억'이라는 달콤한 솜사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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