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서새소리가 들려오는 듯한데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머리는 뜨끈뜨끈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어제부터 으슬으슬 추웠었다. 엄마가 연신 내 이마를 짚어 보시면서 걱정하셨다.
"열이 많이 나네... 어서 병원에 가서 주사라도 맞아야 될 텐데..."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엄마의 독백 속에서 '주사'라는 두 음절을 똑똑히 듣고 그만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엄마와 병원 가는 길은 밤도 아닌 것이 스산하고 어둡기만 했다. 왜 또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온 것인가. 엄마는 주사만 잘 맞으면 복숭아 통조림을 사 주신다고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복숭아 통조림.
하지만 그것을 먹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았다.
'나는 지금 에벨레스 산을 올라가고 있다...'
눈보라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내 마음이었다.
병원 가는 길에는 가로등 높이의 비둘기집이 있었다. 구멍마다 나와 있는 비둘기들이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빤히 쳐다봤다.
"비둘기야, 니가 대신 주사 맞을래?"
비둘기가 고개를 휙 꺾더니 먼산을 바라봤다. 한숨이 나온다. 이런 날은 비둘기마저 부럽다.
열을 재고, 청진을 하고, 목구멍을 유심히 살피던 의사 선생님이 무심히 한마디 툭 던지셨다.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두.방.요."
나는 에벨레스 산 중턱에서 주저앉았다. 내가 올라야 할 산은 봉우리가 두 개로 늘어났다.
간호사 언니가 분위기를 띄웠다.
"아이구우, 우리 정아느은, 주사 자알 맞게 생겼네..."
어떻게 생겨야주사를 잘 맞는지 모르겠다. 그저 주사 앞에모든 걸 내려놓았다. 톡톡 가볍게 두드리는가 싶던 간호사 언니가 갑자기 강스파이크를 날리자연이어 주사 두 대가 왼쪽 엉덩이에 내리꽂혔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엄마가 통조림을 사 주신다고 하신 공약 앞에는(안 울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여섯 살이 아닌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다.
주사를 맞은 후의 세상은 전혀 딴 세상이다.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고, 복숭아 통조림을 치켜들고 금의환향할 것이었다.
통조림이 원터치캔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통조림 따개로 꾹꾹 눌러 가며 따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왜 이렇게 날이 무디지? 잘 안 들어가네..."
엄마의 난항에 내 마음은 타 들어갔다. 통조림 가장자리를 삥 돌아가며 힘겹게 통조림을 따시던 엄마가 대략 1.5센티 정도 남긴 상태에서 포크로 뚜껑을 들어 올리셨다.
찰랑거리는 육즙 사이로 노오란 복숭아 과육이 귀족스런 자태를 드러냈다. 내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힘들었던 오늘 하루를 보상받는 순간이 온 것이다.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면 무릉도원이 열린다. 실제로 무릉도원의 '도'가 '복숭아 도' 아니던가. 실로 극락의 맛인 것이다.
"냠냠냠, 맛있어요."
주사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쟁반 위에 놓인 통조림을 먹다 보니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늘이 양은 쟁반에 소주와 김치를 놓고 음미하듯 소주를 드셨다. 방바닥에 쟁반을 놓고 구부정한 자세로 술을 마시던 아빠가 어린 마음에도 측은해 보일 때가 많았다. 차라리 이 달콤한 복숭아 통조림을 드시면 좋을 텐데, 왜 굳이 쓴 소주를 찡그려 가며 드시는 걸까? 그 이유를 아빠한테 여쭤 본 적이 있었다.
"아빠는 소주가 달다."
하지만 나는 새하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정말 거짓말을 하셨을까.
'아마도 어른들에게는 어린 우리가 모르는 마음의 비밀이 있는 건지 몰라.' 그것은 어쩌면, 기분이 안 좋다가도 복숭아 통조림만 보면 어느새좋아지는 내 마음의 비밀과 비슷한 것일지도 몰랐다.아무리 쓴 소주여도 세상 시름달래주고 기댈 곳을 내준다면 그 순간 만큼은 마음이 달달해질 것이었다.
깜깜한 밤하늘에 황도 같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두려웠고, 달콤했고, 아리송했던 많은 오늘의 감정들을 뒤로하고, 또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