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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Apr 22. 2024

주사는 싫어, 복숭아 통조림은 좋아

우리 마음의 비밀

창가에서 새소리가 들려오는 듯한데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머리는 뜨끈뜨끈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어제부터 으슬으슬 추웠었다. 엄마가 연신 내 이마를 짚어 보시면서 걱정하셨다.

"열이 많이 나네... 어서 병원에 가서 주사라도 맞아야 될 텐데..."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엄마의 독백 속에서 '주사'라는 두 음절을 똑똑히 듣고 그만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엄마와 병원 가는 길은 밤도 아닌 것이 스산하고 어둡기만 했다. 왜 또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온 것인가. 엄마는 주사만 잘 맞으면 복숭아 통조림을 사 주신다고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복숭아 통조림.

하지만 그것을 먹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았다.

'나는 지금 에레스 산을 올라가고 있다...'

눈보라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내 마음이었다.

병원 가는 길에는 가로등 높이의 비둘기집이 있었다. 구멍마다 나와 있는 비둘기들이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빤히 쳐다봤다.

"비둘기야, 니가 대신 주사 맞을래?"

비둘기가 고개를 휙 꺾더니 먼산을 바라봤다. 한숨이 나온다. 이런 날은 비둘기마저 부럽다.


열을 재고, 청진을 하고, 목구멍을 유심히 살피던 의사 선생님이 무심히 한마디 툭 던지셨다.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두.방.요."

나는 에레스 산 중턱에서 주저앉았다. 내가 올라야 할 산은 봉우리가 두 개 늘어났다.

간호사 언니가 분위기를 띄웠다.

"아이구우, 우리 정아느은, 주사 자알 맞게 생겼네..."

어떻게 생겨야 주사를 잘 맞는지 모르겠다. 그저 주사 앞에 모든 걸 내려놓다. 톡톡 가볍게 두드리는가 싶던 간호사 언니가 갑자기 강스파이크를 날리자 연이어 주사 두 대가 왼쪽 엉덩이에 내리꽂혔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엄마가 통조림을 사 주신다고 하신 공약 앞에는 (안 울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여섯 살이 아닌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다.

주사를 맞은 후의 세상은 전혀 딴 세상이다.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고, 복숭아 통조림을 치켜들고 금의환향할 것이었다.




통조림 원터치캔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통조림 따개로 꾹꾹 눌러 가며 따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왜 이렇게 날이 무디지? 잘 안 들어가네..." 

엄마의 난항에 내 마음은 타 들어갔다. 통조림 가장자리를 삥 돌아가며 힘겹게 통조림을 따시던 엄마가 대략 1.5센티 정도 남긴 상태에서 포크로 뚜껑을 들어 올리셨다.


찰랑거리는 육즙 사이로 노오란 복숭아 과육이 귀족스런 자태를 드러냈다. 내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힘들었던 오늘 하루를 보상받는 순간이 온 것이다.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면 무릉도원이 열린다. 실제로 무릉도원의 '도'가 '복숭아 도' 아니던가. 실로 극락의 맛인 것이다.

"냠냠냠, 맛있어요."

주사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쟁반 위에 놓인 통조림을 먹다 보니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늘 이 양은 쟁반에 소주와 김치를 놓고 음미하듯 소주를 드셨다. 방바닥에 쟁반을 놓고 구부정한 자세로 술을 마시던 아빠가 어린 마음에도 측은해 보일 때가 많았다. 차라리 이 달콤한 복숭아 통조림을 드시면 좋을 텐데, 왜 굳이 쓴 소주를 찡그려 가며 드시는 걸까? 그 이유를 아빠한테 여쭤 본 적이 있었다.

"아빠는 소주가 달다."

하지만 나는 새하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정말 거짓말을 하셨을까.

'아마도 어른들에게는 어린 우리가 모르는 마음의 비밀이 있는 건지 몰라.' 그것은 어쩌면, 기분이 안 좋다가도 복숭아 통조림만 보면 어느새 아지는 내 마음의 비밀과 비슷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쓴 소주여도 세상 시름 달래고 기댈 곳 내준다면 그 순간 만큼은 마음 달달해질 것이었다.


깜깜한 밤하늘에  같은 달이 휘영청  있었다.

두려웠고, 달콤했고, 아리송했던 많은 오늘의 감정들을 뒤로하고, 또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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