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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Apr 29. 2024

장기자랑이 열리던 날

오늘의 스타는

장기자랑대회 날이 밝았다.


아버지 지사에 부임  소장님은 사원들의 화합에 진심이분이다. 그러기에 함모여 웃고 즐길 있는 야유회와 장기자랑대회 등을 주기적으로 열어 주셨다.

대회를 앞두고 아빠들은 행사에 필요한 물품 마련에, 엄마들은 함께 모여 음식 장만에, 아이들은 개인기 준비로 각각 분주했다.


사택에서 열린 이날도 사원 가족들이 많이 참여했다. 대략 열 팀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상품은 푸짐했다. 상품 더미에는 과자, 학용품, 생필품 등이 쌓여 있었는데, 유독 큰 뭉텅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필 우승팀에게 돌아가는 상품일 것이었다. 그 안에는 종합선물세트처럼 이것저것 잔뜩 들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과장님네에는 '종근이'라는 늦둥이 내 또래 친구가 있었다. 일단 이 친구는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다. 몸개그는 기본이고 성대모사도 스스럼없이 했다. 원맨쇼의 대가 남보원, 백남봉 선생님처럼 강아지, 닭, 기차 등 별의별 소리를 흉내 냈다. 똑같은지는 몰라도 일단 웃기는 건 인정한다. 나는 이 친구 꽤나 의식다.


각 팀에 있는 언니, 오빠들, 친구들이 나와서 노래도 하고  태권도 품새 같은 개인기도 보여 주며 실력을 뽐냈다. 하지만 종근이가 한바탕 휩쓸고 간 무대 뒤를 이어 빛을 보기란 쉽지가 않았다. 몇 집 건너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도 말이다.


큰오빠는 점잖다. 어깨에 잔뜩 책임감이 들어가 있어서 더 경직되어 있었다. 오빠가 '흠흠'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저는 '꼬마 눈사람'을 부르겠습니다... 한 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많은 박수를 받고 퇴장했지만 역시 임팩트는 약했다. 괜찮다. 작은오빠가 해내면 되는 거다. 작은 오빠는 한창 개구질 아홉 살이다. 종근이 같은 가벼움은 없지만 승부욕은 있다. 가끔 오락실따라가서 보면 오락기를 부술 것 같은 패기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머선 일이고? 작은오빠의 표정이 영 안 좋았다. 울렁증이 있는 것 같았다. 무대까지 겨우 나간 오빠는 시선부터 바닥에 툭 던져 놓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산 까치야, 산 까치야, 어디로 날아가니......"

맙소사! 우리 상품은 어디로 날아가는 거니?

종근이 엄마는 손가락에 거스르미를 제거하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대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주야가 가르쳐 준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을 부르려고 했지만 이 상황을 만회하려면 히든카드를 꺼내야 했다. 무대에 섰을 때 화려한 조명 나를 다. 사람들은 숨소리를 죽였고, 내 눈빛은 살아났다.

그때였다, 나는 카드를 꺼내 휙 던다.


"아♪ 저 푸른 초원 위에♪"


바로  당대 최고의 히트곡인, 왕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이모 집에서 불렀던 노래였다. 자꾸만 불러 보라 기에 용기를 내서 불렀다. 어른들이 손뼉을 치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엄마 무릎에 누워 징징대던 종근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저 카드를 꺼낸다고?'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다.

서서히 열기가 더해졌다. 어른들은 박수와 함께 나의 선창을 따라 불렀다. 마침내는 열광의 도가니, 떼창의 향연이 되었다. 흡사 노래방의 마지막 한 곡을 부르는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장기자랑대회에 어른들이 나설 자리는 없었다. 아빠, 엄마들도 마음껏 외치고 싶으셨나 보다. 예, 좋습니다, 외치세요!


"봄이면 씨앗 뿌려"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

"여름이면 꽃이 피"

"가을이면 풍년 어"

"가을이면 풍년 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겨울이면 행복하네"


사실상 잔치 분위기였다. 어른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손뼉을 쳤고, 애들은 곳곳에서 막춤을 추었다.


"한 백 년 살고 싶어어어어"


끝 음을 길게 처리하고 노래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물개 박수로 환호했지만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부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엄마한테 달려가 얼굴을 파묻었다. 기분이 얼떨떨했다. 사람들이 엄마에게 하는 얘기가 들렸다. 정아는 누굴 닮아서 숫기가 많, 어떻게 그렇게 노래를 잘하. 나는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사실 나는 수줍음 많은, 타고난 'i'니까.


소장님이 다가와 말하셨다

"정아한테는 오늘 선물 많이 줘야겠다."

나는 좋아서 심장이 콩콩콩 뛰었다.


우승은 누에게 돌아갔을까?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것이었다. 사실 나는 종근이만 의식하고 있어서 다른 친구들이 노래 율동, 마술 등을 얼마나 열심히 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마다 재능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초콜릿이며 장난감이며 학용품이며, 골고루 한아름씩 받았다. 모두에게 즐겁게 마무리 된 잔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던 당시의 조직 문화 속에서, 권 소장님과 사모님은 이 틀을 깬 참된 리더였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 동료가족이란 념을 가지고 계셨다. 함께 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상하 없이 대등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했고, 고 무미건조한 생활에 신선하고 활기 넘치는 변화를 일으키셨다. 


우리가 셋집을 못 구하고 있을 때 선뜻 소장님 사택 부를 내주셔서 아버지, 어머니가 두고두고 고마워하셨던 기억이 다. 소장님이 지역으로 발령 받아 가신 뒤에도 부모님은 오랫동안 두 분을 추억하셨다.


어린 눈에 비친 그 따뜻한 미소와 유머를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그분으로 인해 추억의 편은 밝고 맑아졌다.

'권 소장님, 그날의 라이징 스타 정아는 이제 중년이랍니다. 지금은 소식을 알 길이 어디에도 없지만 그 어느 곳에 계시더라도 천수, 만수 누리시기를 정아가 절히 바라고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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